평검사들 목소리 힘실린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9면

9일 '대통령과 전국 검사들의 대화'를 계기로 평검사들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상명하복'조항 등에 입이 묶여 조직 발전 등과 관련한 내부 의견 개진조차 어려웠던 그들이다.

평검사들은 이번 토론회를 준비하면서 '평검사 회의'를 정례화하고 규모도 전국 단위로 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대검이 평검사회의를 정식 모임으로 인정할 경우 이 기구가 사실상 '검사 노조'의 역할까지 할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검찰인사위원회 구성과 관련, 자주 대화를 하자는 노무현(盧武鉉)대통령의 제안도 이들에게 힘을 보태줄 전망이다.

8일 오후 대통령과 평검사들의 토론 방침이 전해지자 검사들은 다소 당황하는 기색 속에서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즉각 서울지검 15층 회의실에 2백여명의 평검사가 자진해 모였다. 지방에 근무하는 검사들까지 참석할 정도로 열기는 뜨거웠다.

모임에서 일부 검사는 토론이 TV로 생중계되는 것이 적절치 않은 데다 두 시간 안에 자신들의 견해를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다며 거부 의사를 보였다. 그러나 참석해 의견을 전하는 것이 옳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참석자들은 부장검사와 부부장검사 10명을 포함시키자는 대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통령이 평검사와의 대화를 제안한 만큼 원칙을 지키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다. 검찰 최고 지휘조직인 대검의 영(令)마저 먹히지 않는 분위기였다.

회의는 자정을 넘겨 9일 오전 1시30분까지 계속됐다. 대통령에게 전달할 내용을 정하고 토론 방식까지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이들의 의견은 수시로 대검과 법무부를 통해 청와대에 전달됐다. 평검사들은 50명이 참석해서는 토론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며 대표 10명이 참여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청와대 측은 검사 50명이 참석하는 당초 방안을 고집했다.

결국 토론자 10명에 평검사 30명이 배석하는 것으로 정리됐다. 토론회 참석 대상은 지방검찰청별 평검사 대표를 중심으로 검찰청 규모를 감안해 정해졌다.

평검사들의 본격적인 토론 준비는 9일 오전 서울지검 11층에서 4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시작됐다.

서울지검의 한 검사는 "대통령이 지금까지의 검찰 행태를 비난할 경우 '그런 것들은 지난 정권의 잘못된 인사 때문'이라는 식으로 대응하자"는 의견을 냈다.

"시간을 고려해 단답형으로 가야 한다""대통령이나 장관의 답변이 강의식일 경우 결례가 되겠지만 끊어야 한다"는 등의 대응책도 꼬리를 물었다.

참석자들은 낮 12시30분 토론장소인 서울 세종로 정부 중앙청사로 떠나기 직전 입장을 정리한 문건을 돌려 보는 등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좌석이 원탁이 아니고 대통령 중심으로 배치된다는 소식에 일부 검사가 반발, 출발이 30분 정도 늦어지기도 했다.

간부들 섭섭한 반응=대검의 한 간부는 "간부들을 포함한 전체 검사와의 토론이 됐어야 실질적인 자리가 됐을 것"이라며 "토론 대상에서 제외된 간부는 마치 개혁 대상이 된 것 같다"고 씁쓸해 했다.

서울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검찰 조직은 젊은 검사의 패기와 간부들의 경륜이 조화돼야 한다"며 "이번 토론으로 지휘부와 간부들의 입지가 줄어들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김원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