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법조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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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남성만의 분야로 굳게 인식되어 오던 법조사회에 처음으로 여성이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51년 제2회 고등고시에 이태영씨(가정법률상담소 소장)가 3명의 합격자 중에 들었을 때였다.『여자가 어떻게 판사를 할 수 있겠는가』라는 구실을 붙여 당시 이 대통령은 이태형씨의 판사임명을 거부했을 정도였다.
법조계는 외국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만큼 여성이 발 들여놓기 어렵고「극소수」의 위치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곳이다.
현재 한국에는 법조인이 2천명이 훨씬 넘지만(판사 4백43명·검사 3백46명·개업변호사 7백45명·기타) 여성은 변호사 이태영씨 외에 앞으로 활약하게 될 사법연수생 강기원씨(사법고시 12회) 황산성씨(12회) 이영애씨(13회)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고인이 된 황윤석 판사, 이렇게 모두 5명의 여성이 고시의 관문을 뚫었을 뿐이다.
여성의 법조계 진출이 이처럼 어려운 이유는『기회가 주어진 것이 겨우 20여년 밖에 되지 못한 점과 사법고시의 성격 때문』이라고 이태영씨는 말한다.
한국에선 해방 이후부터 법과대학을 남녀공학으로 했기 때문에 고시이전 법학의 분야가 여성에겐 극히 생소한 것이었다.
그리고 특히 사법고시는 준비공부가 집중적이고 맹렬한 것이기 때문에 여성들은 체력에서 못당해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고 이 변호사는 지적했다. 공부의 성격과 여성의 건강이 큰 관계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겠지만 법조계에도 더 많은 여성이 나와야한다. 여성 법조인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 너무도 많다.』
이태영씨는 특히 인간의 정이 개입된 문제-소년과 가사 등 가사 등 이론으로만 다룰 수 없는 사건들은 여성이 다루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했다.
『변호사로서 일이 이렇게 폭주하여 쓰러져가면서 일을 해야 할 정도이니 얼마나 여성법조인을 필요로 하는가 알수 있지 않겠느냐』고 그는 말한다.
남녀의 차별없는 똑같은 조건으로 시험이라는 관문을 통해 들어서는 직업인만큼 대우나 일에 있어서는 별다른「핸디캡」을 가질 수 없겠지만, 그러나 여 판사를 못미더워하는 사람이 있듯이 약간의 편견을 받을 가능성이 앞으로도 남아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이 변호사가 처음 판사대리 일을 보고 있을 때 피의자가 오히려 당당하게 검사쪽을 훑어보더라는 일화가 그 좋은 예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선입견을 뚫어내는 길은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것. 『자신의 전공분야를 갖고 그 분야에 관한 한 누구보다도 앞선다면 여자라고 얕볼 수가 없지 않겠느냐』고, 이 변호사는 사회적 편견을 뛰어 넘을 만큼의 실력배양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의 전문분야를 선택하여 꾸준하게 파고 들어감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했다.
이태영씨와 황윤석씨(3회) 이후 20년 가까이 여성의 진출이 없어 현재 법조계에서의 여성 법조인의 문제들은 아직 무엇이라고 집어낼 수가 없을 정도다. 더우기 국가의 임명을 받는 판·검사는 아직 뚜렷한 전례가 없는 채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급을류(사법연수생 초봉)로부터 시작되는 법조인의 생활에 앞으로 진급과 보직 등에서 과연 어떠한 문제들이「여성이기 때문에」작용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점칠 수가 없다.
그러나『다행히도 최초의 벽을 뚫는 어려운 과정이 지났고, 더우기 그분이 법조인으로선 뚜렷한 위치를 확보하셨기 때문에 개인의 노력여하에 따라「핸디캡」없이 나아갈 수 있게 됐다』고 사법연수생 강기원씨는 밝게 전망한다.
지금까지 유일한 여성법조인이었던 이태형씨는 그동안 법학박사 학위를 획득했고 20년 변호사 생활에 5만여건을 처리하여 학문과 실무 면에서『여성「핸디캡」』을 뛰어넘었기 때문에 많은 뒷 여성 법조인들에겐 든든한 전례가 되고 있다.
단지 쉴새없이 공부하고 집에 와서도 일을 해야하기 때문에 여성 법조인들에겐 가정과 시간의 문제를 어떻게 조화시켜 나가야 하는가가 커다란 난관으로 꼽히고 있다. <윤호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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