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기업도 유리천장 여전 … 여성 이사 할당제 갑론을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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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유럽 의회가 20일(현지시간) 유럽 내 매출 5000만 유로(약 713억원) 이상 대형 상장기업에 대해 비상임 이사의 40%를 여성으로 채우도록 하는 방안을 승인했다. 28개 회원국을 거느린 유럽연합(EU)의 대형 상장기업 이사진의 여성 비율은 평균 16.6%(올해 기준)에 그친다. 이 방안이 그대로 실행될 경우 EU 내 여성 지위를 크게 끌어올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 안을 마련한 비비안 레딩 EU 집행위원회 부위원장 겸 법무담당 집행위원은 “성평등을 위한 역사적 순간”이라며 “유리천장에 첫 금이 간 것”이라고 환영했다.

 하지만 이 방안은 EU 회원국과 여성계의 빈축을 사고 있다. 당초 기대와 달리 강제성이 없는 ‘물 탄 지침’으로 전락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지난해 발표된 초안엔 기업이 여성 이사 할당량을 채우지 않을 경우 EU 차원에서 제재를 가할 수 있는 방침이 포함돼 있었지만 최종안에선 빠졌다.

 여성 이사 할당제가 법률로 효력을 발휘하려면 EU 회원국 승인 절차가 남아 있다. 영국과 독일은 논의 초기부터 반대 뜻을 밝혀왔다. 최종안에 처벌 규정이 빠진 것은 영국의 입김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영국 정부 관계자는 이날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에 “우린 성평등을 위해 기업이 자발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여성의 사회 진출과 성평등에 대한 인식이 우리보다 앞선 유럽에서도 여성이 기업에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여전히 풀기 어려운 숙제로 남아 있다. 여성의 재계 고위직 진출이 낮아 고민하던 프랑스는 2014년까지 대형 상장기업의 여성 비상임 이사의 비율을 40%로 맞추도록 2011년 의무화했다. 이 제도를 도입한 지 2년 만에 비상임 여성 이사의 비율은 11.4%에서 26.8%로 두 배 이상 뛰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경제계에서 성공한 여성을 찾기는 힘들다. 고위직에 오르기까지 유리천장이 여전히 견고하기 때문이다. EU 회원국 중 기업 내 여성 비상임 이사 비율이 가장 높은 핀란드도 30%에 미치지 못한다. 독일(20.5%), 영국(18.5%), 스페인(14.3%), 이탈리아(12.9%) 등 주요국의 여성 이사 비율도 낮은 편이다. 직접 경영에 참여하는 자리에 오른 여성은 더욱 희귀하다. 올해 기준 EU 주요 대형 기업 587개 중 여성 대표이사는 26명(4.4%), 여성 CEO는 16명(2.7%)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 각 국의 중앙은행 등 주요 금융기관 임원 57명 중 여성은 단 3명뿐이다.

 한국은 더 열악하다. 한국의 106개 대기업 내 여성 임원 비율은 1.9%로 주요 45개국 중 43위에 그친다. 우리나라는 선진국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중 여성이 출세하기 가장 어려운 국가로 꼽혔다.

전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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