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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어서 오세요~ 가을의 문 닫히기 전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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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소유가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모두가 한때일 뿐. 그 한때를 최선을 다해 최대한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신비요, 아름다움이다. 그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 법정 스님의 산문집 『아름다운 마무리』를 오랜만에 꺼내 보았습니다. 낙엽 따라 떠나는 늦가을 여행을 기획하며, 문득 생각이 도졌습니다. 올해도 단풍이 예전만 못했습니다. 당연히 낙엽도 고울 리 없습니다. 벌써 찬바람이 거세 단풍이 들기도 전에 낙엽이 떨어진 나무도 많습니다. 요즘 분위기를 보면 내년에도 고운 단풍이나 낙엽을 기대하는 건 무리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단풍놀이, 낙엽길 걷기도 추억을 동냥해야 신세가 되는 걸까요.

삶은 소유가 아니라 순간순간의 ‘있음’이고, 그 순간순간이 아름다운 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이라고 합니다. 낙엽도 다르지 않을 겁니다. 겨울 한파를 이겨 내기 위한 힘을 축적하려고 나무는 제 잎을 내려놓습니다. 잎은 나무의 새로운 시작을 위해 기꺼이 낙하를 단행합니다. Week&은 주저 않고 낙엽 따라 떠났습니다. ‘무소유’의 가르침 앞에 낙엽이 곱지 않다고 불평할 수 없었습니다.

week&이 추천하는 낙엽은 경남 함양에 있는 상림공원과 전남 순천 조계산에 있는 굴목이재(굴목재)입니다. 두 곳 모두 그림도 되고 이야기도 되는 대표적인 가을 낙엽길입니다. 상림공원은 1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숲으로 늦가을이면 낙엽 융단길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곳입니다. 조계산 굴목이재는 천년 고찰 송광사와 선암사를 잇는 고갯길입니다. 예부터 스님들이 오가던 오솔길인데 단풍 명소로도 유명합니다. 상림공원도, 조계산 굴목재도 낙엽이 잔뜩 깔려 만추의 운치로 그득했습니다. 도심의 낙엽은 벌써 끝물이지만 남쪽에는 아직 떨어질 준비를 하는 잎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수북한 낙엽 밟으러 떠나시는 건 어떨까요. 낙엽길에서의 겨울 준비, 좋지 아니한가요?

잡을 수 없는 가을, 소유하고 싶어서 길 위의 낙엽에 발도장 콩 콩 콩 …

불일암 가는 ‘무소유길’엔 법정의 향기가 …
전남 순천 조계산 굴목이재

조계산(884m)은 우리나라 불교의 양분과도 같은 산이다. 서쪽엔 조계총림 송광사가, 동쪽엔 태고총림 선암사가 있다. 두 천년 고찰 사이에 스님들만 다녔다는 아름다운 고갯길 굴목이재(굴목재)가 있다. 지금 그 고갯길에도 늦가을이 닿았다.

전남 순천 조계산에는 사시사철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 산자락 주차장엔 경쟁하듯 사람을 태우고 나르는 관광버스가 날마다 줄지어 선다. 그들 대부분이 성지순례 하듯이 타고 넘는 것이 굴목이재다. 골짜기로 단풍나무가 그득해 가을이면 단풍이 곱고, 낙엽이 산길을 수놓는다.

하나 가을 정취 하나를 위해 굴목이재를 오르는 이는 많지 않다. 굴목이재로 가는 길엔 이름난 폭포나 바위도 없다. 해발 700m도 안 되는 주제에 산세도 험하다. 정상에 오른다 해도 이렇다 할 전망 하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기꺼이 고생길을 자처하는 것은 천년의 역사를 벗삼을 수 있어서다.

조계산은 뿌리 깊은 천년 고찰 선암사와 송광사가 동서로 나뉘어 굳건히 자리하고 있는 명산이다. 지도로 보면 꼭 가부좌를 튼 불상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형상이다. 그 등줄기에 해당하는 고갯길이 굴목이재다. 굴목이재 코스는 전체 6.5㎞ 거리로 3시간이면 건널 수 있지만 두 사찰을 들르는 시간을 고려하면 넉넉히 5시간은 잡아야 한다.

불교에 연이 없더라도 두 사찰에는 볼거리가 많다. 산자락 깊이 자리한 송광사엔 발 닿는 데만이 아니라 담벼락·지붕에도 낙엽이 꽃처럼 피었다. 법정(1932∼2010)의 수도 도량이었던 불일암도 가 볼 수 있다. 불일암으로 드는 ‘무소유길’이 송광사로부터 나 있다. 법정 스님의 의자와 낡은 고무신이 여전히 그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굴목이재를 오르기 좋은 시간은 이른 아침이다. 밤 동안 떨어진 낙엽을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상태에서 마주할 수 있는 때다. 낙엽에 발도장을 찍으며 걷다 보면 어느새 늦가을의 기운이 발끝부터 스며 올라온다. 굴목이재는 조계산에서도 아름답기로 유명한 홍골을 거쳐야 나온다. 낙엽도 등산로 초입의 토다리부터 지댄바위 너머 홍골까지가 빼어나다. 다만 크고 작은 바위를 계단 삼아 올라야 해 낙엽을 사뿐히 밟는 느낌은 덜하다.

산벚나무·서어나무·당단풍나무·참나무 등에서 떨어진 낙엽을 밟으며 오르기를 1시간 20분. 가파른 고개를 넘어서니 송광사 굴목이재가 나온다. 여기서부터는 흙길이 이어진다. 큰굴목이재까지 이어지는 1.3㎞ 산길 곳곳이 낙엽으로 수북하다.

굴목이재에선 정겨운 냄새가 발길을 잡는다. 조계산 보리밥집(061-754-3756)이다. 따뜻한 된장국에 11가지 신선한 나물이 한 상 가득한 보리밥 외에 동동주·파전 등을 6000원씩에 판다. 산행 뒤에 먹으면 세상의 그 어떤 산해진미도 부럽지 않다. 보리밥집 인근 장안리 마을까지 자동차가 오를 수 있어 밥만 먹으러 찾는 이도 적지 않다.

큰굴목이재를 넘으면 선암사까지 2㎞가 줄곧 내리막길이다. 경사는 가파르지만 경치가 좋아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다. 낙엽 낀 바윗길을 한 시간가량 내려와 선암사골에 이르면 산책로 옆으로 편백나무 숲과 야생화 단지가 펼쳐진다. 그 길로 내처 선암사로 향한다. 산행 마무리는 선암사 뒷간에서 치러야 한다. 300년 묵은 해우소로 여러 차례 문학작품에서 소개된 바 있는 명소다. 지금은 보수공사가 한창이지만 늦가을 산행을 마무리하는 장소로 이곳만 한 데도 없다.

보는 맛, 밟는 맛 … 천년 묵은 숲이 준 선물
경남 함양 상림공원

때를 놓치면 낙엽만큼 초라하고 쓸쓸한 구경거리도 없다. 단풍처럼 낙엽도 수명이 짧다. 하나 경남 함양 상림공원은 유효기간이 긴 편이다. 숲이 무성해 가을 끄트머리까지 낙엽으로 홍수 이루는 명품 낙엽길이 이곳에 있다.

낙엽길에도 등급이 있다. 겉보기만 좋은 게 아니라 밟고 다니기에도 좋아야 1등급이다. 그래서 단풍놀이 명소 찾기보다 어려운 것이 좋은 낙엽길 찾기다. 일단 좋은 그림을 완성하려면 단풍나무의 종류가 다양하고 심어진 범위가 넓으며 빽빽하게 길을 채우고 있어야 한다. 바닥은 판판해야 대접받는다. 그래야 낙엽도 고르게 쌓이고 밟는 느낌도 좋다. 그런 조건을 다 갖춘 곳이 바로 함양 상림공원이다.

상림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숲이다. 신라 최고 문장가이자 학자였던 고운 최치원(857년~?)이 진성여왕(재위 887~997년) 때 홍수로부터 백성을 돌보고자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원래는 ‘대관림(大館林)’이었으나 긴 세월 속에 숲의 위쪽만 자취가 남아 ‘상림(上林)’이란 이름이 붙었다. 천년 묵은 숲 상림에는 100년 이상 묵은 아름드리 나무가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과거 홍수의 주범이었던 낙동강 줄기의 위천은 숲 옆으로 은은히 흐르며 운치를 더해 준다.

늦가을에 상림에 들면 낙엽에 압도되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곳저곳 사방이 온통 낙엽 천지다. 약 20만㎡(약 6만500평) 면적에 2만 그루가 넘는 나무가 터를 잡고 있어 11월이면 낙엽이 온 세상을 뒤덮는다. 낙엽도 종류별로 다양하다. 갈참나무·돌참나무 등 참나무류를 비롯해 서어나무·느티나무·복자기나무 등 수종도 100종이 넘는다. 은행나무 한 종류로 도배된 도시 가로수길에 익숙해져 있었으면 영 낯선 풍경일 따름이다.

상림 한가운데 서 있는 사운정(思雲亭)이라는 정자로부터 이어지는 숲길이 대표적인 낙엽길이다. 대형 버스가 지나고도 남을 만큼 넉넉한 낙엽 길이 500m가량 이어진다. 길 양옆으로 나무가 터널처럼 우거져 있는 모습이 길에 선 사람을 끌어당기는 듯하다. 낙엽은 빈틈없이 바닥에 수북하다. 워낙 나무가 촘촘한 데다 낙엽을 치우는 일도 없어 말라 바스러진 낙엽 위로 새로운 낙엽이 쉬지 않고 포개어진다.

걷노라면 숲길이 아니라 단풍색 주단길에 선 기분이다. 고른 흙길에 낙엽이 곱게 깔려 있어 발에 무리가 없다. 상림공원의 모든 길은 언덕이 없이 평탄해 가족이 함께 걸어도, 유모차를 끌고 다녀도 걱정이 없다.

사실 상림은 가을이 전부가 아니다. 문화해설사 배정경씨의 말을 빌리자면 “봄에는 신록으로, 여름에는 연꽃단지가 화려하고 낙엽이 눈으로 바뀌는 겨울도 환상적”이다. 실제로 상림 숲길은 녹음이 한창 때인 여름엔 햇빛도 뚫지 못해 최고의 피서길로 통한다. 잎이 많이 떨어진 요즘엔 햇빛이 숲길에 적당히 닿아 제법 화려한 빛을 낸다. 아침때는 이슬을 머금은 낙엽길에 빛이 은은히 들어 특히 아름답다. 위천에 물안개까지 덮치면 금상첨화다.

너른 숲길에서 가지치기한 좁은 숲길도 구석구석 하나같이 보물이다. 상림을 가로지르는 개울과 마주치는 또 다른 낙엽길이다. 낙엽은 오솔길이 모자라 개울에도 넓게 내려앉아 사방에서 아늑한 분위기가 난다. 사람이 적어 한적하게 산책을 즐길 수 있다. 바람도 잘 들지 않아 낙엽 밟는 소리와 지저귀는 새소리가 기분 좋게 귀를 자극한다. 두 명이 나란히 걷기에 좋아 연인이 속삭이며 걷기에 제격이다.

글=백종현 기자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단풍 만큼 고운 낙엽길 2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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