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06)|휴선 회담의 개막 <전반부> (20)|「6·25」21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 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 전쟁 3년|포로 논쟁 (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1952년1월2일 「유엔」군 측은 의제 제4항을 다루고 있는 분과 위원 회의에서 포로 교환에 있어 이편의 기본 입장을 밝히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내놓았다.
(1)포로는 1대1로 교환하고 나머지는 송환을 희망하는 민간인과 1대1로 교환한다.
(2)교환된 포로는 앞으로 전쟁에 다시 참여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석방하며 귀환을 불원 하는 포로도 선서 석방한다.
(3)휴전 조인 후 나머지 억류 민간인은 귀환을 희망하면 석방한다.
(4)송환을 강요당하지 않기 위하여 국제적십자위원회는 모든 포로와 억류 민간인과 회견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이와 같은 「유엔」군 측의 제안은 1대1로 교환한 후 나머지 공산 포로와 납북 인사와의 교환을 염두에 두고 작성된 것이었다. 그런데 공산 측은 「유엔」군 측의 포로 교환의 기본 방침인 『자유 송환』에 대해 포로 전원의 『강제 송환』을 들고 나왔다.

<"유엔군 포로 백10명" 보고>
그들은 1월3일에 전일에 제출한 「유엔」군 측 제안과는 정면으로 상치되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내놓았는데 이날 공산군은 지난 12월27일로 끝난 1개월의 「시험 휴전」후 처음으로 서부 전선의 고낭포 지구에서 맹렬한 공격을 가해왔다.
회의장에서 포로 문제 토의에 「타이밍」을 맞추어 군사적 압력을 가하는 한편 이제 그들 전력이 회복됐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수작이었다.
①전쟁 포로는 전원 교환해야 한다.
②교환은 지난 12월18일에 교환된 포로 명부에 의거해서 전체 대 전체로 행해야 한다.
③전쟁 포로와 억류 민간인과는 교환할 수 없다.
④국제적십자사와 같은 중립 기관은 송환 혹은 석방을 택한 포로와 회견할 수 없다.
⑤포로의 전투 재 참가를 금지시키는 어떤 선서 방식도 반대한다.
⑥포로의 국경 분류는 원 거주지가 아니라 원 소속 부대에 따라야 한다.
공산 측은 이와 같이 전원 강제 송환을 주장하면서 「유엔」측이 이보다 앞서 제안한 상병 포로의 즉시 교환안도 거부하였다.
한편 「유엔」군 측 수석 대표 「C·타너·조이」 제독은 그의 한국 휴전 회담 회고 저서인 『공산주의자들의 협상 수법』(How Communists Negotiate)에서 포로 문제로 쌍방이 격돌하여 「유엔」군 측이 『자유 송환』 원칙을 고수하게된 경위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유엔」군사령관은 「제네바」 협정에 따라 17만6천명의 공산 포로 명단을 벌써 「제네바」 국적 본부에 제출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공산 측이 「제네바」에 보고한 「유엔」군 포로는 겨우 1백10명뿐이었다.
그 경위는 이러했다. 1950년7월13일에 북괴 외상 박헌영은 「유엔」 사무총장에게 포로 문제에 관한 「제네바」 협정을 지키겠다는 「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북괴는 이를 증명이나 하듯이 1950년8월15일과 그해 9월12일 두 차례에 걸쳐 국적 본부에 「유엔」군 포로 1백10명을 수용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이것이 이때까지 외부 세계에 밝힌 공산 측의 「유엔」군 포로에 관한 정보의 전부였다. 그리고 실제로 북괴는 「제네바」 협정에 조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협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포로들에게 공언한 사실이 나중에 판명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평양 방송을 통하여 전투 개시 9개월 동안에 잡힌 한국군과 「유엔」군 포로는 6만5천명 이상이라고 자랑하고 있었다. 내가 포로에 관한 정보와 자료를 교환하자고 처음 제안한 것은 1951년11월27일 회의에서였다. 공산 측은 이를 거부하다가 12월11일에 가서야 마지못해 이 문제를 다루는데 동의하였다. 처음부터 이상조의 주장은 포로 전원을 무조건 송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주장에 따른다면 우리가 「제네바」에 보고한 17만6천명의 공산 포로와 그들이 보고한 1백10명의 「유엔」군 포로와 교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어처구니없고 웃을 노릇이어서 우리는 이 제안을 거절하였다.

<5만 유엔군 포로 행방 묘연>
그후 1주일만인 12월18일에 공산 측과 겨우 타협이 되어 우선 쌍방의 포로 명부를 교환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그런데 공산 측이 넘겨준 「유에」군 포로 명부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명부에는 미군 포로 3천1백98명과 한국군 포로 7천1백42명을 포함한 1만1천5백59명의 「유엔」군 포로 이름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제네바」에 보고한 1백10명의 포로 중에서도 67명의 이름은 이 명부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는 공산군에 잡힌 「유엔」군 포로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6만5천명 정도 된다고 추산했는데 단지 1만1천5백명이라니, 나머지는 어떻게 됐단 말인가? 이상조는 나머지 포로들은 병사했거나 또는 전선에서 자의로 석방 됐다는 변명이었다.
휴전 회담이 처음 개최될 때 우리 대표단은 포로 문제 해결에 있어 자유 송환이 과연 가능할까하는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막상 공산 측이 불과 1만1천여명의 우리포로 명단을 제시하고 나머지는 공산군에 강제 편입을 뜻하는 『자유 의사에 따라 전선에서 석방하였다』고 주장하게 되자 이제 정말 우리편에서 자유 송환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는 결심을 굳히고 또한 그 이유와 근거도 공산 측이 스스로 마련해 준 셈이 되었다. 만약 반공 포로들이 강제로 송환된다면 우리는 한국전 개입의 도의적 바탕을 스스로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워싱턴」이 한국 휴전을 성립시키려고 여러 문제에서 많은 양보를 했지만 포로 송환 문제만은 강경한 태도를 취하였다.
포로 명부가 교환된 다음날인 12월19일에 발표된 특별 성명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공산 측의 무성의와 포로 명부의 미비를 지적한 다음 「유엔」군 측은 포로 교환 문제에 있어 인도적 원칙을 고수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트루먼」의 이 같은 강경한 성명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요인이 작용하였다. 첫째는 거제도에 수용된 반공 포로들이 피 어린 투쟁이 「유엔」군 측의 자유 송환 원칙 고수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주=본 연재 223회부터 227회까지 참조) 둘째는 「조이」 제독을 비롯한 현지의 「유엔」군 측 대표들이 포로 문제에 있어서는 사태를 올바르게 인식 판단한 것과 이 문제와 관련해서 미국 여론이 비등했기 때문이었다.
「조이」 제독은 포로 송환은 공산 측의 반대나 회담 교착에 구애되어 적당히 타협할 문제가 아니라 인도적인 견지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굳은 신념을 가졌던 것이다.

<미 여론도 자유 송환 고수>
그리고 문산의 「유엔」 대표단 전략 회의에서는 이런 결정을 즉시 「워싱턴」과 동경에 건의하여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데 의견이 일치되었다. 「조이」 제독은 이 회의석상에서 결론으로 『만일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는 공산 포로들을 강제로 송환한다면 이는 다시없는 인류의 비극이며 「유엔」 자신이 한국 전쟁에 개입한 도의적 기반을 스스로 부정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한편 이와 때를 같이하여 미국 내 여론도 자유 송환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는 논조를 폈다. 몇 좌경지를 제외한 거의 모든 신문과 방송은 『공산 치하의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느니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반공 포로를 구출해야 하며 그들을 만약 강제 송환 한다면 이는 인류의 최대 죄악으로 규정지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유력지 「시카고·헤럴드·트리뷴」지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오스트리아」 산록에서 강제 송환에 반대하여 3천명의 소련군 반공 포로들이 집단 자살한 예를 들어 강제 송환은 절대 불가하다고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만약 반공 포로들이 송환된다면 자유 세계를 그리워하며 투항한 공산군의 생명은 어떻게 될 것이며 앞으로 그들이 다시 서방 세계로 귀순할 것을 바랄 것인가? 이런 점에서 공산군이 앞으로도 그들이 총을 겨누고 있는 「유엔」군에 안심하고 투항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위하여도 자유 송환은 절대로 필요하며 강제 송환이 가져오는 비극을 충분히 인식해야한다.』
여론에 민감한 미국으로서는 「매스컴」의 이런 주장에 외면할 수 없었다. 사실 이 문제를 양보했다가는 서방측의 민주주의의 기틀 자체를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래서 「트루먼」 대통령도 포로 문제만은 유화적인 태도를 취할 수 없게된 것이다.
한편 공산 측이 강제 송환을 고집하게된 것도 그들대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많은 공산 포로, 본국 송환 거부>
첫째로 그들은 자유 송환 원칙에 따르면 많은 공산 포로들이 본국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남일은 거제도 수용소에 위장 포로로 잠입시킨 공산 첩자를 통해 많은 포로들이 송환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판문점에서 포로 토의와 거제도 사태와는 함수 관계에 있다는 것은 「유엔」군 측이 회담 기간 중 뼈저리게 느낀 사실이었다.
둘째는 전선에서 공산군의 투항자를 더 내지 않으려는 생각에서였다. 투항자를 포함한 포로 전원이 송환된다면 앞으로 이탈자에 본보기 경고가 되리라는 것을 계산에 넣은 것이다.
세째는 극히 상식적인 이유이지만 송환 반대 포로가 많으면 그만큼 북괴나 중공 정권이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세계에 폭로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쌍방은 어쩔 수 없는 이유로 「자송」과 「강송」을 각각 고집하여 포로 문제 토의는 평행선을 달릴 수 밖에 없었다.
◆주요일지 (1951년8월27·28·29일)
※8월27일 ▲한국 공군에 미 군사 고문단 설치 배속 ▲「리지웨이」사령관, 문산의 대표단 방문 ▲북평 방송, 미기가 산동·절강성에 침입했다고 비난.
※8월28일 ▲적, 양구 동북방서 새 공격 ▲해군 본부 헌병대 신설 ▲이종찬 육군참모총장, 휴전 회담 중단과 관련해서 전선 경계 강화 담화
※8월29일 ▲양구 북방의 적 공격 격퇴 ▲「리지웨이」사령관, 개성 폭격 사건을 재조사하자는 적 제의 거부 ▲58명의 국회의원, 대전으로의 천도 안 제출 ▲이 대통령, 김성수 부통령 문병 ▲일본의 팔번·부사 제철사, 한국으로부터 10만t의 고철 수입을 미 상사와 계약.
※알림=「민족의 증언」문의나 연락전화는 (28)8211 (교환)의 74번, 야간과 일요일은 (94)3415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