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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유 2:0 10만원' 문자 베팅 … "신분 노출 꺼리는 연예인 쉽게 빠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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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개그맨 이수근(38)씨는 31개월 동안 3억7000만원, 가수 토니안(35·본명 안승호)씨는 35개월 동안 4억원, 가수 겸 배우 탁재훈(45·본명 배성우)씨는 39개월 동안 2억900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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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4일 서울중앙지검 강력부가 발표한 불법 스포츠 도박 사건에 걸려든 연예인들의 도박 기간과 금액이다. 이번 사건은 황기순·신정환씨 등 과거 연예인 도박 사건과 커다란 차이가 있다. ▶혼자가 아닌 여러 명이 ▶2~3년이란 비교적 오랜 기간에 걸쳐 ▶정상적인 연예 활동을 병행하면서 도박 행위를 했다는 점이다. 2011~2012년까지만 하고 현재는 손을 뗀 상태라는 것도 독특한 점이다.

 하지현 건국대 의대 교수(정신과)는 “과거 필리핀 원정 도박으로 문제가 된 황기순씨의 사례는 도박 중독으로 볼 만한 요소가 많았다”며 “그러나 이번 사건에 연루된 연예인들은 도박 중독으로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하 교수는 “이수근씨 등은 불법 도박을 하는 동안에도 꾸준히 TV에 출연하며 연예 활동을 해왔다”며 “진짜 도박 중독이라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데 그런 단계는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검찰에 따르면 이수근·탁재훈씨는 김용만(46·집행유예 2년 선고)씨와 같은 축구동호회에 참여했다. 그러다 친분이 있는 동호회원 한모(37·구속)·김모(37·구속)씨의 권유에 넘어가 도박에 빠지게 됐다. 토니안·앤디(32·본명 이선호)·붐(31·본명 이민호)·양세형(28)씨는 연예병사로 군 복무 시절 휴가를 나왔다가 김씨를 통해 도박을 접하게 됐다.

 이들은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통해 주로 박지성 선수가 나오는 영국 프리미어리그(EPL)의 축구경기 결과를 놓고 돈을 거는 이른바 ‘맞대기’ 도박을 했던 것으로 검찰 조사에서 드러났다. 운영자와 1대 1로 돈 내기를 했다는 얘기다. 예컨대 ‘맨유(맨체스터 유나이티드) 2:0 승 10만원’하는 문자를 보내는 식이었다. 맞으면 도박 운영자가 수수료 10%를 뗀 9만원을 맞춘 사람의 계좌로 넣어줬다. 틀리면 운영자가 지정하는 계좌로 10만원을 보내야 했다.

 윤재필 서울중앙지검 강력부장은 “수수료 3%를 받고 연예인을 모으는 홍보 담당을 한 사람도 있었는데 이미 사망했다”며 “연예인들이 자주 출입하던 대형 포장마차나 주점을 운영했던 인물”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건의 연예인들은 처음엔 불법 도박이란 죄의식 없이 동호회원 등 친한 사람들끼리 심심풀이 차원에서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흔히 친구나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 주요 스포츠 경기의 결과를 놓고 돈내기를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간이 길어지고 내기 돈의 액수도 점점 커지자 ‘걸리면 낭패’란 불안감을 갖게 됐다. 윤 부장은 “처음엔 자기 계좌로 하다가 나중엔 매니저 등 남의 계좌를 빌려서 한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정당한 거래라고 생각했으면 차명 계좌를 이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에겐 형법의 도박죄가 적용됐다. 형법은 상습도박과 일반 도박으로 나눠서 처벌한다. 일반 도박은 재판에서 유죄가 인정돼도 벌금(1000만원 이하)만 내면 되지만 상습도박은 3년 이하의 징역형(또는 2000만원 이하 벌금)을 받을 수도 있다. 이수근·토니안·탁재훈씨는 상습도박죄, 앤디·붐·양세형씨는 일반 도박죄로 각각 재판을 받을 예정이다. 이번 사건에선 판돈 5000만원 이상이면 상습도박으로 판단했다는 것이 검찰의 설명이다.

 국민체육진흥법은 스포츠 경기를 놓고 돈 내기를 하면 형법의 도박죄보다 엄하게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스포츠토토와 비슷한 방식의 도박판을 운영하면 7년 이하의 징역이나 7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불법 스포츠 도박에 돈을 걸고 참여한 사람도 5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의 연예인들에겐 국민체육진흥법 위반 혐의는 포함되지 않았다. 불법 스포츠 도박 이용자를 처벌하는 조항은 2012년 2월에 신설됐기 때문에 법률 불소급의 원칙에 따라 그 이전 범죄는 처벌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법 스포츠 도박 시장은 분석 방법에 따라 4조~11조원(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 또는 11조~39조원(형사정책연구원) 규모로 추산된다. 지난해 합법 스포츠토토의 매출액은 2조4000억원이었다.

 국민체육진흥공단의 성욱제 스포츠공정문화팀장은 “불법 스포츠 도박업체들이 ‘차단할 테면 해보라’며 문어발식으로 사이트를 확장해 완전 차단이 어렵고 점점 지능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공단이 차단한 불법 스포츠 도박 사이트는 지난해 4월부터 올 9월까지 5만8772건에 달한다. 토니안·앤디·붐·양세형씨는 불법 스포츠 도박 사이트도 이용했다 .

 일부 연예인들이 동시에 불법 스포츠 도박에 빠진 데는 연예인이란 직업적 특성도 작용했던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경쟁이 치열한 연예계 생리에 따라 스트레스는 극심하지만 얼굴이 알려져 있어 공개적인 장소에서 스트레스를 풀기 어려운 사정이 있었다는 설명이다. 방송을 위해 대기하는 자투리 시간에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쉽게 즐길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스포츠 도박은 끊기 어려운 유혹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불법 도박은 스포츠토토와 달리 경기당 걸 수 있는 금액의 제한이 없고 환급률이 높은 것(스포츠토토는 50~70%, 불법 도박은 80~90%)도 이용자들이 몰리는 요인이다.

 하 교수는 “10년 동안 무명으로 고생해도 일단 한 번 뜨면 큰돈을 벌 수 있는 연예계의 속성은 그 자체로 도박성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며 “연예인은 수입과 출퇴근 시간이 불규칙적이어서 일반인들보다 순간적인 쾌락의 유혹에 빠지기도 쉬운 편”이라고 말했다.

 박경래 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번 사건의 경우 일부 연예인들 사이에서 잘못된 놀이문화가 형성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며 “인터넷·휴대전화 도박은 익명성이 보장된다는 점에서 신분 노출을 꺼리는 일부 연예인들이 쉽게 빠져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주정완·이상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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