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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제자는 필자>|<제25화>카페 시절 (15)|이서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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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기생 제도의 종말>
「카페」하면 한번쯤은 난봉꾼과 바람난 여자를 연상하게 된다. 밤마다 분단장 곱게 하고 손님을 기다리는 여급과 가정을 등지고 아내를 비켜놓고 색다른 재미를 보려고 찾아드는 손님이나 모두가 온당치는 못 하다. 그러나 그때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그 때가 좋았다는 감회가 없지 앉으니 안타깝다.
그때쯤, 해만 저물면 웃음을 파는 아가씨와 가정을 등지고 거리를 헤매는 젊은이들이 만나는 장소가 「카페」요, 술좌석이긴 하지만 요즈음 같이 마구 노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차마 못하는 일도 있어서 크나큰 탈선은 있을 수 없었다. 만사가 돈 하나로 쉽게 해결이 나고 자유라는 것을 절제도 없이 누리려는 풍조는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러기에 여급이나 기생으로서 훌륭한 남편을 만나 의젓한 주부가 된 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 그 시절-한창 소문 높은 아가씨 중에는 애국 지사의 부인, 경제계의 중진의 부인도 있으며 가난한 애인을 도와 출세 길을 열어준 갸륵한 여인도 있었으니, 이제 그분들도 60 고개를 넘은 노인이 되었다. 간혹 거리에서 만나면 어찌나 마음 든든한지 혼자서 흐뭇해진다.
그때 「카페」나 「바」에는 일본인 여급도 적지 않았으며 짓궂은 젊은이들은 농담같이 『쪽발이』라고 불러 침략자의 앞잡이 같이 비웃는 일도 있었으나 한국 청년과 일녀와의 사랑은 심심치않을 만큼 꽃 피었으니 그들은 이것을 연애에는 국경이 없다고 외쳤다.
이제는 세상을 떠났지만 명동에「사보이·호텔」을 세운 조모 사장의 경우. 그를 따라서 반생을 고스란히 바친 내조의 덕행은 칭송할만 하다. 그때는 이혼이니 쌍벌죄니 하는 수작은 듣지 못했다. 한번 결혼하면 무슨 일이 있든지 이혼이란 못하는 것으로 돼 있어서 남편이 첩을 10명을 두어도 시앗을 친동생 같이 거느리는 것이 부도의 철칙이었으니 숨이 막힌다. 그 대신 아내가 있는 사나이와 사랑을 하는 편에서도 요사이 같이 이혼을 하자 재혼을 하자는 소리는 차마 못 했으니 속으로는 오장이 썩어도 겉으로는 분수를 지키는 양 알맞은 처지에서 지나치는 일은 없었다. 그때는 「카페」나 「바」의 여급은 어쩐지 기생보다는 낮은 편으로 돼 있었지만 나중에는 기생과 여급이 한데 어울려서 기생도 여급이 되고 여급도 기생이 되는 혼란을 빚어냈다.
이것은 분명 5백년 누려오던 기생 제도의 종말을 나타낸 것이니 기생이 여급보다 대접을 받은 것은 기생이 되려면 반드시 가무와 음곡에 통달해야 하며 귀빈 앞에서 거행을 하는 예절이며, 나아가서는 시 한수쯤 짓기도 하였지만, 차차 그 전통이 허물어져 미모와 청춘만을 가지고 나서는 여급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으니 여급이 격상이 된 것이 아니라 기생이 격하된 셈이다.
기생과 여급의 교류가 한창일 때 서울에는 기생 조합이라는게 있었다. 나중에 일인들이 일본식으로 조합을 권번이라고 고쳐서 불렀지만 어쨌든지 지방에서 상경하는 기생이 엄청나서 그야말로 대만원을 이루었다.
더우기 서기 1929년 소위 시경 20주년 기념 박람회가 서울에서 개최될 때를 고비로 전주·광주·동래·대구·진주 등 남한의 큰 도읍에 있던 기생들이 서울로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한강 남쪽에서 왔다해서 한남 권번을 만들고 서쪽에서 모여든 평양·해주 등지의 기생들은 다동 권번이라는 간판을 올렸으니 다방골에 권번지가 설치된데서 지명을 따서 지은 이름이라지만 본시 다동은 옛날부터 이름 높은 지대이기도 했다. 그 외에 또 하나 한성 권번이라는게 있었으니 이것은 서울 본토박이 관기들이 모인 곳이니 격조 높은 척 자못 의젓했다.
기생이란 사교장에서 꽃 노릇을 하는 거라지만 나라는 망하고 재계는 시들어 가는 판이니 기생이 바라는 것은 오직 대지주의 아들뿐이다.
박람회 연예관에서 팔도 기생이 가무로써 연예를 보이면 모여드는 사람은 거의가 바람난 사나이들이다. 그 중에서도 부잣집 아들들은 미인을 고르기에 바쁘다. 그러나 기생을 불러서 노는데도 격식과 절차라는게 있어서 막대한 돈이 든다.
아버지는 대지주이지만 아들은 백면 서생이다. 부형이 돈을 줄리가 없다. 이것은 「카페」 여급과의 경우와도 똑같지만 바람난 부잣집 아들이 돈을 쓰는 길은 고리채 외에는 없고 그것도 본인의 이름 가지고는 통하지 않으니 부득이 부형의 이름으로 표를 써놓고 돈을 얻는다. 그런데 그 이자가 엄청났다. 1개월에 3할이다. 3개월만 되면 본전과 동액이 되고 더 넘어가면 야단이 난다.
이것은 모두 일본인 고리 대금 업자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일이지만 그때쯤 자식이 부조의 인장을 위조하여 일본인에게 사기를 했다면 가문이 욕된다해서 땅을 팔아서라도 빚은 갚게 되니 살찌는 것은 일본인이요, 이래서 대지주는 차차 몰락해 갔다. 「카페」와 요릿집, 여급과 기생. 나라 망한 뒤 겨우 남아 있던 지주들의 거의가 여기서 시들었으니 이것도 식민 정책의 하나인성 싶다.
끝으로 하나 덧붙일 것이 있으니 그때 한창 자손들이 일본인의 고리채를 쓰니까 안타까운 마음에 신문에 광고를 내는 일이 많았는데 그 광고를 하나 소개하련다.
『급고, 본인의 손 이○○이 행위 부낭 하여 본인의 명의와 도장을 위조하야 이수한 채관을 득용한다 하니 내외국인은 수모라도 견기치 말되…본인은 소불 부담….』 <끝>

<다음은 경무대서 일했던 이들을 필진으로 한 경무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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