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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몸짓, 땀 … 그 속에 우리들의 감동이 있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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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극단 ‘부에나비스타’ 단원들이 다양한 얼굴표정을 짓고 있다. 단원들은 15일 창단 공연 신체극 ‘지하철 이야기’로 관람객들을 처음 만난다. [프리랜서 공정식]

“연극이나 영화를 봐도 듣지는 못하는 우리들에겐 ‘감동’이라는 말 자체가 사치입니다. 마음껏 울고, 웃어 보고 싶습니다.” 대구에 사는 청각장애인 김모(22·여)씨가 수화로 기자에게 전한 바람이다.

 김씨처럼 연극이나 영화를 보면서도 듣지 못해 답답했던 청각장애인들이 스스로 몸짓으로만 스토리를 이어가는 신체극 전문 극단을 만들었다. 국내 최초다. 공장 근로자와 학생 등 20~40대, 청각장애인 8명으로 구성된 극단 ‘부에나비스타’(스페인어로 ‘좋은 전망’이란 뜻)다.

 지난 7일 오후 9시 대구 남구 농아협회 사무실. 부에나비스타 단원들의 연습이 한창이었다. 수화통역을 하는 이문천(43)씨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화난 감정을 대사 대신 몸으로 표현한 것이다. 공장 근로자인 단원 황성원(21)씨가 “화 푸세요”라는 말 대신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이씨의 몸짓을 받았다. 2시간 동안 이어진 연습에서 단원들 사이엔 한마디의 말도 오가지 않았다. 수십여 차례의 얼굴 표정과 몸짓만 주고받았다.

 “사랑합니다. 결혼합시다”라는 대사는 꽃다발을 전해 주며 활짝 웃고, “짜증납니다”란 대사는 인상을 찌푸리는 형태다. “바쁩니다” 는 발을 빨리 움직이는 것으로 대신한다.

 부에나비스타는 15일 대구 대명동 소극장 한울림에서 첫 번째 공연을 갖는다. 올 3월부터 일주일에 4번, 한 번에 2시간씩 8개월 동안 준비해 온 신체극 ‘지하철 이야기’다. 이 작품은 대구 지하철 참사를 모티브로 40여 분간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 탄 다양한 사람들의 일상을 다룬다. 한 연기자는 “청각장애인들도 일반인들과 똑같은 장면을 보고 울고, 웃을 수 있는 연극이 신체극”이라고 했다.

 부에나비스타는 연극인 이재선(37·대구 대봉동)씨가 지난해 농아협회에 “스코틀랜드처럼 신체극 극단을 만들어 보자”고 제안하면서 만들어졌다. 2008년 대구시립극단 소속 배우로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을 찾은 이씨는 당시 2000여 편 출품작 가운데 50%가 신체극이라 놀랐다고 한다. 그는 “언어가 달라도 누구에게나 뜻이 통하는 연극을 접했다. 청각장애인들과 함께 극단을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협회 측은 문화·예술에서 소외된 장애인을 위한 극단 추진을 결정했고, 지난 2월 예산 400만원으로 단원 공개채용부터 실시했다. 20여 명이 응모했다. ‘재단법인 장애인 재단’도 1600여만원을 지원했다. 오디션을 통해 끼가 보이는 단원 8명을 뽑아 극단을 꾸렸다.

 대본은 이재선씨가 쓰고 있다. 신체극 대본은 ‘큐시트’처럼 글로만 쓰인 일반 대본과 다르다. 대사를 글로도 표현하지만, 대부분 그림으로 장면, 장면을 표현한다. 그래서 공연 준비는 더 힘들다. 한 차례 연습이 끝나면 온몸이 땀에 젖는다. 몸으로만 전체 스토리를 이어가야해서다. 몇 번씩 연습하고, 몸짓 수정도, 대본 수정도 계속된다.

 부에나비스타의 공연은 관람료가 따로 없다. 사회 ‘비주류’를 위한 공연을 내세운 데다, 장애인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마음껏 공연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100원이든 1000원이든 관람객들은 정성만 보이면 된다. 수익금은 극단 운영비로 쓰인다.

 단원들에겐 세 가지 소원이 있단다. 1년에 상·하반기 두 차례 새 작품으로 무대에 오르는 것, ‘신체극 전용 극장’을 만드는 것, 그리고 청각장애인 주관으로 신체극 페스티벌을 한번 열어봤으면 하는 거다.

대구=김윤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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