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연안은 뱅글라데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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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뱅글라데쉬」독립 운동의「심벌」인「셰이크·무지부르·라만」「아와미」연맹 당수의 석방은「알리·부토」대통령의 통일「파키스탄」의 포기와 「뱅글라데쉬」의 기성사실화를 상징적으로 뜻한다.
작년 3월26일이래 9개월여의 감금 끝에「부토」「파키스탄」대통령이「라만」을 석방한 것은 세 가지의 이유가 있다.
첫째 외국의 압력이다. 동「파」의 자치권 확대 운동을 벌이던「라만」의「아와미」연맹이 70년 말 총선거에서 역승, 제일 당이 됨으로써 군사 탄압만 없으면「라만」이 당연히 수상으로 등장할 입장이었던 만큼 그의 체포·투옥은『민의를 무시하는 것』으로 미국까지도 포함한 동서국가들이 크게 반발, 그의 석방을 호소해왔었다.
「부토」로서는 동「파」를 상실한 서「파」를 재건하기 위해 서방 10개국「파키스탄」 원조회의와 소련의 지원을 얻기 위해서는 이러한 국제적 압력에 더 이상 견디어 나갈 수가 없었다.
둘째로는 인도와「뱅글라데쉬」에 서「파」장병 및 관료 등 7만 내지 10만 명이 인질로 되어있는 사실이다. 「뱅글라데쉬」는 이들 인질에 대한 「전범 재판」위협으로「라만」의 석방을 강요해왔다.
셋째로는「부토」자신이 국제적인 압력과 인질의 부담으로 견딜 수 없는 동시에「라만」이 동「파」에서 압도적인 인기를 지니는 것을 이용하여 그의 영향력으로「뱅글라데쉬」의 완전 분리 독립만은 막고 어떤 형식이든 주권 2개 공화국으로 구성된 명목상의 연방으로라도 통일「파키스탄」의 형체를 유지하려 했으나 「라만」은 이를 거부하여 한 가닥 희망도 사라진데서 차라리 관용의 「제스처」로 앞으로 대인전후 문제처리에서 보다 나은 반대합부를 기대하는 저의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백만「뱅글라데쉬」민중의 피의 대가로 독립은 쟁취되었지만「뱅글라데쉬」「건국의 아버지」「라만」앞에는 험난한 과제들이 산적해있다.
그 동안「라만」이라는 거국 일치체제를 유지할 지도자가 없는 탓으로「아메」수상의 내각은 불안정하기만 했다, 면·「주트」·다 등의 국유화 정책을 시작하긴 했지만, 그 전도는 반드시 순탄해 보이기만 한 것도 아니다. 게다가 천만 난민의 귀국과 생활 보장 문제는 건국 초부터「라만」에게 커다란 시련을 안겨줄 것이다.
더우기「라만」의 석방까지에는 싸움을 그칠 수 없다는 구설 아래 무기를 버릴 것을 거부해오던「무크티·바히니」(해방군)의 극좌 세력은 정권의 안정을 위협하고 있다. 그래서 우선「아메드」수상의 내각은「단결 강화」라는 호소와 함께 극좌 세력의 탄압으로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음은 외국의 승인. 「스웨덴」·호주·영국 등은 승인의 뜻을 비치고 있으나 인군의 주둔 상황하에서는 승인은 어려울 것이다. <이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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