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뉴스클립] Special Knowledge<517>사료로 본 서울의 역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10면

이지은 기자

오래전부터 서울은 한민족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기원전 18년 백제 건국 때 위례성(몽촌토성, 풍납토성 일대), 1394년 조선 건국 때 ‘한양’이란 이름으로 ‘1000년’ 수도 자리를 지켰습니다. 일제강점기 ‘경성부’는 1945년 광복과 함께 ‘서울’이란 이름을 얻었고 그 후 팽창을 거듭했죠. 서울도서관·서울기록문화관과 함께 사료 14개를 추렸습니다. 광복 후 60년, 서울의 역사입니다.

1960년대 초 ‘개발 열풍’이 분 서울의 모습이다. 오른쪽 도로가 을지로, 왼쪽 도로가 종로, 그 가운데로 청계천이 흐른다. 사진 오른쪽 아래 구 서울시청사(현 서울도서관)도 보인다. [중앙포토]

서울시헌장(1946년 8월 10일) 광복 1주기를 맞아 제정됐다. 당시 한국에 주둔하던 미군이 작성해 서울시에 헌정했다. 헌장은 서울을 ‘서울자유시’라고 표현했다. 이는 서울이 1949년 ‘서울특별시’라는 법적 명칭을 부여받는 근거가 됐다. 헌장은 서울이 독립된 행정단위가 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헌장 제정 1개월 뒤인 1946년 9월, 군정법령 106호가 공포돼 서울시는 경기도에서 분리되고 도(道)와 대등한 행정단위로 격상된다. 같은 달 서울은 김형민 제1대 서울특별시장을 맞는다. 48년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공식 수도가 된다.

미복귀 공무원 해면 발령의 건(1952년 11월 25일)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시 조직은 부산으로 이전했고, 이곳에서 행정 업무가 이뤄졌다. 1951년 2월 ‘서울특별시 부산행정청’이란 이름으로 피난 시민에 대한 구호 업무를 수행했다. 이 같은 전시 체제는 이듬해 원상복구됐다. 서울 재건단은 전쟁으로 전국에 흩어진 공무원들부터 수소문했다. 그러나 서울로 돌아오지 못한 공무원이 많았다. 문건은 서울시가 행방불명된 공무원들을 기다리다 결국 면직 처리하는 상황을 담고 있다. 혼란스럽던 전후 서울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료다.

부랑아접수부(1957년) 부랑아접수부도 전후 서울의 혼란을 읽을 수 있는 문서다. 전쟁 끝에 서울의 인명피해는 12만9000명(사망자 3만7000명)에 달했다. 거리는 떠도는 고아들로 넘쳐났다. 서울시는 1953년 휴전 이후 부모 잃은 아이들을 임시 거처로 옮기거나 고아원으로 보냈다. 그 기록이 부랑아접수부다. 접수부에는 고아들의 인적사항이 적혀 있다. 이 문건은 미복귀 공무원 해면 발령의 건과 함께 전후 복구사업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보여주는 뜻깊은 자료다. 경북 청도문서고에 영구 보존돼 있다.

서울특별시장 선거개표록(1960년 12월 29일) 서울시가 첫 민선 서울특별시장을 맞는 순간을 기록한 것으로 역사적인 의미가 크다. 1960년 11월 지방자치법이 개정되면서 지방자치단체장을 직선제로 선출하게 됐다. 이에 따라 같은 해 12월 29일 최초의 민선 시장인 김상돈 제11대 시장이 선출된다. 1951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낸 그는 시장에 당선된 뒤 1961년 5·16 때까지 재임했다.

서울통계연보(1961년) 행정도시의 모습을 갖춘 서울시가 처음 발간한 통계연보. 서울의 모든 것을 담아 매년 발행돼 지금까지 중요한 시정 자료로 쓰인다. 연보는 서울의 토지, 인구, 농·임업, 건설업, 상공, 운수, 전력, 통신, 노동, 금융, 선거, 교육, 문화, 후생, 보건 등 서울 관련 통계를 총망라했다. 첫 연보에서 조사된 행정구역은 9개 구였다. 이후 1963년 서울이 한강 이남의 경기도 일대를 편입하고 행정구역을 확대해 조사 대상은 늘어났다. 현재는 25개 구다.

서울도시계획사업(일단의 공업단지 조성) 실시계획 인가 신청(1965년 3월 27일) 1960년대 ‘수출입국·공업입국’ 기치 아래 진행됐던 공업단지 조성 과정을 다룬 주요 문서다. 중앙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1965년 서울에서 인천에 이르는 땅 60만 평엔 구로공단이 세워진다. 봉제, 섬유, 가발 생산을 주 업종으로 했다. 공단에 몰려든 젊은 여성들이 열악한 근로조건 속에서도 ‘한강의 기적’을 일궈온 면면을 볼 수 있다. 그때의 공단은 사라지고 이제 구로디지털산업단지가 됐다.

여의도공군기지 이전에 관한 협정체결안(1968년 8월) 1980년대까지 이어진 서울 개발 열풍의 시초. 1966년 3월부터 4년간 재임한 ‘불도저 시장’ 김현옥 제14대 서울시장은 서울을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강변로, 청계고가 등 도로와 지하도, 육교를 수없이 지었다. 그의 ‘돌격 건설’을 제대로 보여준 게 바로 여의도 공군기지 이전이다. 협정안은 일제시대부터 줄곧 공군기지로 활용된 여의도를 개발하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시와 국방부 간에 이뤄졌다. 기지 자리엔 시민아파트가 들어섰다.

전차 전면 운휴 공고(1968년 11월 26일) 1960년대 이전 전차는 서울 시민의 주요 교통수단이었다. 그러나 변두리 지역이 계속 개발되자 궤도 없는 길을 달리는 버스에 밀려 1968년엔 전차 운행이 전면 중단된다. 이 내용을 담은 공고문은 어느덧 시민의 발이 된 지하철의 역사를 다시 보게 한다. 전차 중단 이후 한동안 버스가 확산됐다가 74년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면서 서울엔 지하철 대중교통시대가 열렸다.

서울특별시 도시계획사업 토지구획정리 지역지정 중 도면(1970년), 학원 이전계획 및 단계별 추진안(1977년 5월 23일) ‘강남’을 만든 도시개발계획 문건들이다. 우선 도면엔 1970년대 서울시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맞춰 한강 이남을 신시가지로 만들기 위해 착수한 초대형 구획 정리 상황이 그대로 담겨 있다. 당시 주거지 중심으로 진행된 강남 개발사업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는 강남에 공무원 아파트를 짓고 공무원들을 먼저 이주시켰다. 학원 이전계획에 따라 4대문에 있던 교육기관들은 대부분 강남 신개발지로 옮겨갔다. 상당수 중산층이 명문 학교를 따라 강남 아파트로 이주했다. 서둘러 진행된 강남 개발사업이 강남·강북 불균형을 가져왔다는 의견도 있다.

한강개발 기본계획 확정(1983년 9월 2일) 강남 개발로 한강은 서울을 동서로 관통하는 하천으로 변모했다. 그런 한강은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에 대비해 서울의 상징으로 개발된다. 1982년 9월 한강개발 기공식과 함께 한강정비사업이 5년간 추진됐다. 관련 보고서는 저수로 정비, 둔치·자동차전용도로 조성, 하수차집관로·하수처리장 건설을 포함하는 대규모 공사 과정을 보여준다. 이 덕분에 한강은 수해를 벗어난 친수공간으로 재탄생했다. 하지만 인공구조물이 과도하게 도입돼 자연 원형을 훼손했다는 비판도 따랐다.

국가경기장 건설사업 실시설계 용역 시행(1984년 3월 14일) 88년 서울올림픽 개최가 확정된 1981년부터 서울시는 이 행사를 도약의 기회로 활용했다. 이미 급성장한 서울이 올림픽을 통해 어떻게 인프라를 확충해 가는지 확인할 수 있는 문서다. 시는 올림픽 특별기구를 설치해 잠실에 올림픽 경기장과 공원을 지었다. 국제도시의 면모에 맞게 도심과 불량 주거지에 대한 재개발사업도 계속 추진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수습대책 중 상황일지(1995년 6월),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백서(1996년 6월) 1994년 성수대교 붕괴에 이어 95년 6월 강남의 호화 백화점인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개발시대 ‘빨리빨리’ 문화가 빚어낸 참사였다. 삼풍 사고 사망자는 501명, 실종 6명, 부상 937명에 달했다. 해방 이후 서울에서 발생한 단일 사건 중 최대 참사다. 제30대 조순 서울시장은 1995년 7월 1일 예정된 취임식 전날 벌어진 참사를 수습하느라 취임식을 늦춰야만 했다.

상암 새천년신도시 조성 디지털미디어시티(DMC, Digital Media City) 사업 추진계획(2000년 5월 23일) 서울시의 최근 화두인 ‘도심 재생’ 개념을 본격적으로 담은 시정 문건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은 낙후된 서울 서북부 지역에 도시재생 기회를 가져왔다. 상업 기능을 갖춘 월드컵경기장을 중심으로 거대 쓰레기 매립지인 난지도가 생태공원으로 새롭게 조성됐다. 수색 일대엔 첨단 창의혁신도시 DMC 사업과 환경친화 주거지 조성 사업이 시작됐다. 지금도 개발 중인 DMC는 혁신도시의 세계적인 벤치마킹 대상이다.

서울디자인자산; Seoul Design Assets(2010년) 한때 서울은 난개발로 몸살을 겪었다. 그래서 일부 지역의 경관은 흉했다. 이로 인해 골머리를 앓던 서울시는 ‘2010 세계디자인수도서울’을 선언했다. 국제디자인연맹(IDA)으로부터 도시 미관을 인정받아 디자인 수도 자격을 받는다. 이를 계기로 서울시는 서울의 디자인 역사와 서울성을 보여주는 디자인 자산 41개를 선정했다. 훈민정음, 경복궁, 숭례문, 청계천, 월드컵경기장 등이 그것이다. ‘서울디자인자산’ 문건엔 41개 자산의 면모가 충실하게 담겼다.

이지은 기자
<자료: 서울시 정보공개정책과>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