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0)윤일선<전 서울대총장·대한적십자 상임위원>|인도와 평화의 대좌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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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분단 4반세기만에 우리민족이 그토록 갈망하던 대화의 광장이 마련됐다. 그것도 내가 10여 년이나 몸담고 있던 대한적십자사에 의해「가족 찾기 운동」이 제의되었고, 북으로부터는 반응을 받고 26년간의 단절사이에 새로운 가교가 놓이는 듯하여 흔히 갖는 망향의「센티멘털리즘」보다는 민족최대의 염원인 남북통일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향한 굳은 첫 걸음 같아 조금씩 떨려오는 흥분을 가눌 길 없다.
지난 8월12일「가족 찾기 운동」이 제의되었을 때 많은 식자들이 용기와 희망과 함께 때로는 우려를 표했다. 그것은 너무나 긴 단절 속에서 생긴 불신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 남북의 첫 대좌는 동족 의식과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전 인류의 공동생활과 운명을 개척하는 우리들의 슬기를 시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26년 전에 묶인 사상의 사슬이 하루아침에 풀리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그만큼 긴 세월이 흐른 뒤에야 사상의 장벽이 무너질 수도 있다.「적십자 정신」그대로 인도주의에 입각해서 인내로 의견충돌을 참고 시비의 장애가 있을 정치적 차원을 떠나 인도적 견지에서 시종일관 해주었으면 한다.
이번의「이산가족 찾기 운동」은 우리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여론이 모두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원만한 결과를 기대하고 있다. 그만큼 많은 기대와 아울러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무슨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만 우리의 기대가 이룩된다고 하기보다는 그 전제조건이 확실해야만 한다.
물론 그것은 진지한 태도, 문제에 접근하는 진실성이다.
만일 진실을 상실했을 때 문제의 해결은 물론이려니와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는 죄과를 범하게될 것이다.
특히 수차에 걸쳐 북괴 측에 기만되어온 우리들인 만큼 굳은 신념과 자신, 그리고 실패 때 실망이 없는 평화로운 마음으로 대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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