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재 어|정병조<성대 유학대학장·영문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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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가재 발 씻는 산골에 살면서 낫 놓고 기억 자도 모르는 무식꾼이 「프랑스」말을 쓴 다면 모두들 거짓말이라고 할 것이다. 내 고향은 경산도 산골인데 그곳 면 소재지에서도 10여리 들어간 두메에서는 비누를 「사분」이라고 한다. 이것은「프랑스」말의「사봉」이다. 또 모자를 「사포」라고 한다. 이것도 「샤포」라는 「프랑스」 말임에 틀림없다. 그러면 비누니 모자니 하는 소위 박래품은 「프랑스」 신부들에게 묻어 들어 왔음이 확실하다.
그후에 끊임없이 물결치는 문명의 파도에 씻기고 밀려서 그런 외국어는 바뀌고 없어지곤 했는데, 가장 물결이 미치지 못하는 구석진 땅에는 아직 그것이 남아 있는 것이다. 큰물이 졌을 때의 지저분한 찌꺼기가 강둑의 후미진 구석에 오래도록 남아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내 고향인 면 소재지에서는 「사분」이라고는 안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섹겡」이라고는 한다. 이것은 일본말이니까 다음 차례로 일본 상품이 밀려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뿐 아니라 당혜·당황·당목 등 당자가 붙은 것은 중국에서 전해온 물건일 것이고 양말·양산·양동이 등 양자로 시작되는 물건 이름은 서양에서 건너 왔다고 봐서 대개는 틀림없다.
이렇게 일상 용어로 쓰이는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나라의 문명의 변천을 어렴풋이 더듬어 나갈 수 있다.
그런데 아까 말한 찌꺼기 말이 벽촌 구석에 남아 있는 것을 들으면 마치 문갑 구석에서 뜻 밖에 고조 할아버지가 쓰시던 옥 물 뿌리를 발견한 것처럼 귀중하고 반갑다. 그것은 가령 아무 댁 할아버지가 상투를 자르고 종아리를 맞았느니 일인이 놀리는 유성기를 할머니네가 주렴을 드리우고 들었느니 하는 옛이야기처럼 재미있다.
그러나 귀중하지도 않고 재미도 느낄 수 없는 추악한 잔재 어가 시골구석이 아니라 대도시 한복 판 일수록 활개를 치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그런 말들은 우연히 발견한 옥 물 뿌리가 아니라 독나방처럼 살아서 날아다니면서 온갖 독소를 사방에 뿌리고 있는 것이다. 가령 「와이로」라는 말은 송충이만큼이나 징그럽고 구질구질한 말이고 송충이처럼 모든 푸른 잎을 갉아먹고도 알을 슬어 마침내 온산을 벌거숭이로 만들 말인데도 특히 도시에서, 특히 상류 사회에서 애용되고 있다.
또 가령 「기합」이라는 괴상한 말은 「기아이」라는 일본말의 한문자를 우리 발음으로 읽은 것이겠는데, 처음에는 군대에서나 쓰이던 말이 요새는 곧잘 일상 용어로도 쓰이는 것을 듣는다. 꾸중을 한다는 정도의 뜻으로도 기합을 먹인다고 하는 것 같다. 이렇게 지저분한 잔재 어는 하루빨리 없어져야 할텐데 이런 찌꺼기를 말끔히 쓸어 갈 큰물결을 어떻게 하면 일으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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