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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6·25」21주…3천여의 증인회견·국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 전쟁 3년|딘 소장의 고난(1)|남과 북의 포로 수용소(1)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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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딘」소장, 안재홍씨 만나>
한국 전쟁은 여러 가지 면에서「통상 전쟁」과는 다른 점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포로 문제는 그 대표적 「케이스」라 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남과 북의 포로 수용소도 포화가 불꽃튀는 전선 못지 않게 「이념 전」의 싸움터였다.
물론 남과 북의 수용소는 전자가 1929년에 체결된 「제네바」 협정을 엄수한데 반하여 후자는 오직 학대와 세뇌를 일삼음으로써 양자 사이에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었다.
그러나 우리는 「시공」이 한정된 수용소 안에서 벌어진 「이념 전」에서 많은 피와 고난의 대가로 결국 승리를 쟁취하여 「자유 만세」를 기록했고, 동시에 여러 귀중한 교훈도 얻었다. 그럼 먼저 이때까지 별로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던 북한의 포로 수용소부터 살펴보겠다. 이야기는 실제로 북한 수용소에서 갖은 고초를 겪다가 휴전 후 송환된 국군 포로 증언과 각종 자료와 기록을 종합하여 전개시키겠다.
「북한 포로 수용소」 첫 머리는 대전 전투에서 적 포로가 되어 3년간 북한에서 수용 생활을 하다가 송환된 미24사단장, 「월리엄·F·딘」소장의 체험을 그의 저서 『죽음의 생활 3년』(My three years As A Dead Man by Maj, Gen. William F. Dean)에서 간추려 보겠다.(본 연재 73·74·75·76회 참조. 『나는 전주·대전·수원을 거쳐 한강 온 나룻배로 건너 옛 서울시 경찰국 건물로 호송됐다. 이날이 8월28일쯤으로 기억된다. 여기서 「테이블」위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니까 중장 계급장을 단 괴뢰군 장군이 다가서면서 「안재홍씨와 김규식씨를 만나 보고 싶지 않는가」라고 묻는 것이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내가 좋아하는 남한 정계의 지도자들이었지만 이런 신세로 그분들을 만나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괴뢰들은 붙잡힌 안재홍씨를 나 있는 방에 데리고 왔다. 안 선생은 몹시 창피한 낯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이렇게 인사를 건넸으나 그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악수를 해보니 그의 손바닥은 땀에 촉촉이 젖어 있어 몹시 공포에 사로잡힌 것 같이 보였다. 이날 오후에 나는 다른 괴뢰군 중장에게 심문을 받았다.

<아군 병력 묻자 적게 대답>
그는 24사단의 병력을 묻기에 실제 병력보다도 3∼4천을 적게 대답했다.
이것은 괴뢰군이 아군 병력을 추산하는데 갈피를 못 잡게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전쟁이 발생할 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에 정규 병력 이하로 온 것이다. 그러나 당신네 군대는 충분한 병력을 가지고도 큰 성과는 얻지 못했다.」
나는 이런 말로써 괴뢰군 중장을 곯려준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더 까다로운 질문으로 나에게 역습을 가해왔다. 「당신은 부하들에게 왜 한국에까지 와서 싸우는가를 설명한 적이 있는가?」
이 질문은 나의 아픈 상처를 찔렸다. 나는 일찌기 「유럽」에서나 일본에서 왜 우리가 싸우는가를 부하에게 일러준 후에야 전투에 내 보내곤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에 대해 부하들에게 알릴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공산주의자에게 거짓말을 해야했다. 이 바보 같은 자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죄를 짓는 것처럼 싫은 노릇이었지만 나는 서슴치 않고 「물론 부하들에게 설명 했구말구」하고 대답해 버렸다. 요다음부터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부하에게 참전 설명을 잊지 않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
그 다음 질문은 더 괴상한 것이었다. 「일선에서 어떻게 당신을 남과 구별하는가? 어떻게 사병들이 그대가 장군이라는 것을 알아내는가 말이다」.
「나는 조그마한 별 두개를 철모에 붙이고 있었다.」「지프는 어떻게 구별하는가?」「지프에도 별 두개를 달고 있다.」「가죽 방석을 깔고 있었는가?」「잘 생각 안 난다.」 이날 저녁에 괴뢰 장군과 함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건물 앞에 섰을 때 「이차를 본 일이 있지?」한다.
그것은 운전병인 「말콤·D·화이트」가 자랑하던 내 지프였다.
그 속에는 아직도 가죽 방석과 새 번호표까지 그대로 있었다. 그는 별 두개가 붙어 있는「지프」의 번호 판과 나의 철모를 주면서「기념품으로 가지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자기는 내 차에 타고 나는 「트럭」에 태우더니 거기를 떠났다. 그 「트럭」 한 폭 판에 놓인 의자에 내가 앉고 내 둘레에는 6명의 괴뢰군 감시병이 바닥에 둘러앉았다. 이 감시병들은 달리는 동안 노래만 열심히 불렀다. 그 노래란 모두 괴뢰 군가, 이승만 박사와 김성수씨를 욕하는 노래, 그밖에 「스탈린」을 찬양하는 노래 등이었다.
우리는 드디어 나룻배를 타고 임진강을 건너 백천에 도착했다. 백천에는 어느 경찰서 앞에서 괴뢰 책임 장교는 정차를 명하더니 우리는 밖에 대기케 하고 자기는 그 집에 들어가 버렸다. 이 마을이 언제나 내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는 것은 이 유치장 속에서 들려는 끊임없는 비명 소리 때문이었다.

<고문당하는 비명 들려줘>
한시간 후 그곳을 떠날 때까지 고문당하는 비명 소리는 간단없이 내 고막을 때렸다. 한참 가다가 의자가 부서져 이것을 던져버리고 옆에 있는 감시병들과 같이 자동차 바닥에 그냥 주저앉았다.
그러다가 나는 아주 발을 뻗고 누워버렸다. 그랬더니 다음에는 감시병들이 내가 누운 위에 포개 눕는다. 물론 이것은 나를 해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좁은데서 서로 눕고자하니 이렇게 되는 것이었다. 내 팔이고 발이고 사정없이 온몸을 마치 뱀과도 같이 감아버리다시피 누워버린 것이다. 나는 설사 때문에 부득이 7∼8차나 차를 멈추게 했다.
운전병은 노래를 부르며 때때로 하늘의 별도 쳐다보며 한눈을 팔다가 그만 자동차를 뒤집어엎고 말았다.
그러나 한명만 갈빗대를 다쳤을 뿐 다들 무사했다. 그후 감시병들은 뒤집힌 차를 바로 잡아놓았지만 이번에는 발동이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오래오」라는 마을까지 7∼8 「마일」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어느 여관에 들었다. 온종일 어린애들이 모여들어 내 얼굴을 쳐다본다. 나중에는 인솔 장교가 나를 마을 한복판으로 데리고 가서 사람들을 모여놓고 구경을 시켰다. 그러나 누구하나 나에게 무엇을 던지거나 야유도 하지 않고 그냥 바라만 볼뿐이었다.

<마을 사람 모아 구경시켜>
우리가 평양에 들어선 것은 그날 밤이었다. 정치보위부 본부 앞에 이르자 나는 다른 장교와 감시병에게 인수되고 다시 해방 공원 근처의 어느 집에 끌러갔다.
거기서 한복 차림의 한국인이나를 영접하였다. 「저는 장군의 통역입니다. 잘 보살펴 드리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인사를 하였다. 그러나 인사말 속에 자기 이름이 무엇인가를 대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자기가 「R·K·H」라는 사람이라고 알러 주면서 부디 이 이름만은 불러주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부탁이었다.
내가 든 집은 양옥인데 방은 2개고 방과 방 사이에는 이중으로 된 문이 있었다. 내가 잠을 잘 때에는 감시병 한명이 방에 들어오고 통역 「R」과 또 한사람의 민간인이 같이 잠을 자고 밖에는 다른 감시병이 지키곤 하였다. 아침 식사는 「R」과 내가 함께 들곤 했는데 그는 자기가 김일성 대학의 영문학 강사였으며 전쟁이 나고부터는 주로 압수 문서 번역을 하였다고 알려주었다. 독서 이야기가 나오고, 또 내가 음악을 무척 좋아한다고 했더니 그는 매우 기뻐했다.

<미군 포로 지내기 좋다고>
그는 자기같이 순수 문화를 신봉하는 사람이 군인이 된다는 것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R」은 자기가 일본서 공부했으며 「모스크바」도 다녀왔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그 이튿날「R」 은 모두 영문으로 된 공산 서적과 잡지 등을 한아름 가지고 왔다. 나는 「레닌」주의 독본, 소련 공산당사 등의 책도 읽었다. 이밖에 읽으라고 주는 것은 모조리 읽었다. 나는 읽을 뿐만 아니라 이 책들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가도 알아내려고 애썼다. 「마르크스시즘」에 대해서는 예전에 「캘리포니아」대학 정치과에서 공부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번역문은 그러한 나에게도 좀 색달라 보이는 것이었다. 나는「R」 통역을 통해서 늘 이렇게 따로 격리시키지 말고, 포로 수용소로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의 대답이란 「오, 그들 미군 포로 말입니까? 그들은 참으로 행복하고 즐겁고 유쾌한 생활을 하고 있지요. 그들은 항상 휘파람을 불며, 노래를 하고, 농담을 하며 놀지요」라는 식이였다.
9월6일에 나에게 한 방문객이 왔는데 그는 김이라는 괴뢰군 총좌였다.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이 사람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는 성이 날 때는 얼굴에 핏대를 올리고 타이를 때는 감언 이설로 꾀려고 했다. 또 공갈을 칠 때는 입에 거품을 물고 덤벼드는 재주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붓이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었다. 만일 내가 또다시 그를 만날 기회가 있다면 마음껏 그를 조롱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나는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주요일지(11월15·16·17일)
※11월15일=▲영군, 박천에 재돌입 ▲미 공군, 회령 폭격 ▲「놀랜드」의원, 전선 시찰 ▲「네루」수상, 한국전 장기화 예상 언명 ▲「애치슨」 장관, 중공 개입 경고.
※11월16일=▲미7사단 갑산에 육박 ▲「트루먼」극동 평화는 중공에 달려있다고 언명 ▲장면 대사 안보리 참석 예정 ▲애급 정부, 1936년의 영애 조약 무효 선언.
※11월17일=▲서부 전선서 격전 ▲이 대통령 국회에 백낙준씨 총리 인준 재고 요청 ▲ 「트루먼」성명에 중공 야유로 회답 ▲「베반」영 외상, 한만 국경 완충지 대안, 미국과 협의중이라 언명 ▲미 합참본부 의장 「브래들리」원수, 서독 재무장 주장 ▲「유엔」 파견 중공 대표「모스크바」에 기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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