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벤처, 기업공개 전 자금조달 길 열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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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까다롭기로 유명한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이르면 내년부터 ‘크라우드펀딩(crowdfunding)’을 통한 벤처기업의 자금 조달을 허용하기로 했다. 크라우드펀딩은 인터넷을 통해 불특정 다수(crowd)로부터 자금을 조달하는 기법을 말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확산과 함께 발전해 ‘소셜 펀딩’이라고도 한다.

지금까지는 창업 아이디어나 자선 행사, 예술가 지원 등에 활용됐는데 이를 벤처기업 자금 조달에 응용하겠다는 것이다. 수많은 소액투자자가 크라우드펀딩 사이트를 통해 벤처기업 주식을 살 수 있게 된다는 얘기다.

 SEC는 23일(현지시간) 이런 내용의 제도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고 워싱턴포스트(WP)를 비롯한 미국 언론이 전했다. 이는 지난해 통과된 ‘벤처기업 창업지원법(JOBS act)’에 따른 조치다. 기업이 주식을 팔아 자금을 조달하자면 기업을 공개한 뒤 증권거래소에 상장을 해야 한다. 그러나 재무상태도 부실하고 영업실적도 별로 없는 신생기업으로선 기업공개(IPO) 문턱을 넘기 어렵다. 반면에 크라우드펀딩을 통하면 이 같은 제약 없이 손쉽게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다만 규제가 허술한 틈을 타 벤처 사기가 기승을 부릴 것을 우려해 투자자 보호 장치도 마련하기로 했다. 우선 기업당 자금 조달 한도는 연간 100만 달러(약 10억6000만원)로 제한했다. 조달 규모에 따라 기업의 재무상태나 사업실태에 대한 정보도 더 많이 공개하도록 했다. 투자자는 연소득이나 자산이 10만 달러 이하면 1인당 연간 2000달러로 투자를 제한한다. 소득이나 재산이 많은 투자자라도 연간 10만 달러를 넘길 순 없다.

 SEC가 마련한 방안을 놓고 업계에선 찬반 양론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법무법인 라바톤의 마이클 스토커 파트너는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는 격”이라며 “순진한 소액투자자만 피해를 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달리 크라우드펀드 캐피털 자문의 셔우드 나이스 대표는 “신생 벤처가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금난 때문”이라며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자금 물꼬를 터주면 벤처기업 성공률도 높아질 것”이라고 환영했다. SEC는 앞으로 90일 동안 의견 수렴을 거쳐 이 제도를 내년 초 정식 도입할 예정이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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