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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제자는 필자|제12화 조선은행(8)|일제징용피해 중국에 자원전출 해방되자 귀국 길 막혀 고생 막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중·일 전쟁 이후 해방까지(38년∼45년)는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중공업중심의 군수산업체제강화와 일계 자본의 카르텔형성시기였다. 37년의 중일전쟁을 계기로 그때까지의 농공병진체제는 군수공업체제로 재편됐다.
이 같은 생산체제의 전환에 따라 전시입법인 자금조정법·외국환관리법 등이 공포되어 군수산업에 대한 집중융자를 강제했다. 이외에도 조선금융단을 동원, 수신금리평준화와 저축장려운동을 전개하여 전비조달을 위한 각종 공채소화에 혈안이 되기도 했다. 특히 태평양전쟁개시 후 해방될 때까지 국내 금융기관과 민간이 일본공사채 및 주식·증권 등에 투자를 강요당한 것이 1백6억 원에 달했다.
또한 일본정부후원아래 국내에 진출해온 일계의 거대한 자본은 40년대 초기에 이미 국내 전산업자본의 74%를 차지하였었다. 특히 석탄(아오지), 제련(원산·장항·진남포), 펄프(신의주·길주), 기계(경인), 시멘트(삼척), 조선(부산) 등 중공업분야는 독점화과정이 단시일 안에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원료 및 시설재 도입이 격증, 우리 나라의 무역수지는 급격한 입초로 악화되었다.
조선은행은 중일전쟁의 본격화에 따라 중국련은, 화은, 상은 등 남경친일정권계 은행의 설립에 조력, 일본의 경제전 확대에 앞장섰고, 제남출장소를 비롯, 각지에 30여 개의 지점과 출장소를 설립, 이들 현지의 자본을 흡수하여 한국 내에 이체 방출하는 등 일제식민정책에 기여했다.
해방을 중국에서 맞아 귀국할 때 고생이 많았던 이상덕씨(한은 감사·부산은행장역임)는 은행생활을 조사과에서 시작했는데 그때 조사과에는 여러 가지 재주가 많았던 고 윤태오씨가 있었다. 그 분은 1년 내내 검정양복 한벌로 지내고 여름에는 꼭 맥고모자를 쓰고 다녔으며 집안이 넉넉하여 성북동에 대저택이 있었는데도 은행까지 언제나 걸어 다니는 등 일종의 기인으로 행동했다. 일인들이 그분의 복장에 곧잘 시비를 했으나 태연히 일관했다. 아마 짐작컨대 식민치하의 울분이 그런 여러 가지 기행을 나타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분은 43년 금강산에 입산한 뒤 소식이 두절되었다.
40년대 초기에는 중국에 20여 개의 지점이 생겨 한국인들이 많이 나갔다. 벽지수당도 있었지만 일제의 징용을 피하는 길도 되었기 때문이다.
이상덕씨가 부산지점을 거쳐 43년엔가 산동지방 제남지점으로 갔고 김상영씨(8대 국회의원)가 북경지점에, 홍윤섭씨 (현 외환은행이사)가 천진지점에, 한석환씨(현 한은 국고부장)가 서주에 각각 근무했다. 해방이 되자 중국각지에 산재해있던 20여명의 한국인직원들이 귀국하기 위해 김상영씨에게 모두 연락, 북경에서 합류했다. 당초 10월초에 만주를 경유해서 귀국할 예정을 했으나 그때가 모택동·장개석군 간의 만주전쟁이 한창 치열할 때여서 기차가 불통이었다. 배도 없고 육로도 막혀 발이 묶인 이들은 그해 겨울을 북경의 싸구려여관에서 지냈는데 나중에는 노자가 모두 떨어져 아르바이트를 하는 둥 고생이 막심했다.
처음에는 각자가 갖고있던 의복 등을 팔아데다가 나중에는 더 팔 것이 없어져 귀국하는 일인들이 남긴 옷이랑 가구 등을 중국인에게 전매해주는 고물상 겸 거간 노릇까지 하여 근근 생활비를 벌었다한다.
이분들은 그래도 독립된 조국이 기다리고있다는 마음 든든함에서 저녁마다 모여 콩 안주에 배갈을 마시고 기염을 토했다. 이듬해 2월에 미군정고문 스트링거씨(나중에 부총재역임)의 주선으로 천진에 보내온 배를 타고 모두 귀국했다.
한국인들은 처음으로 웅기지점에 발령 받은 문상철씨(현 조흥은행장)는 미남총각으로 그곳 처녀들에게 인기가 좋아 매우 로맨틱한 3년을 보내기도 했다.
웅기는 서울에서 기차로 23시간이나 걸리는 한반도의 최북단이어서 모두들 가기 싫어했으나 웅기·나진 등이 일제교역의 중심지여서 환업무·수출입업무 등 은행업무 면에서는 오히려 배울 것이 많았던 곳이었다. 특히 만주 잡곡의 대일 수출, 일본 잡화의 만주공급, 목재수출입 등이 모두 이곳을 통했고, 반도 호텔을 지은 일인 야구소유의 아오지탄광(그는 당시 이외에도 흥남질소비료공장, 석탄액화공장, 일본질소 등 거대한 기업을 갖고 있었다) 종업원3만여 명의 예금을 웅기지점에서 맡고 있었다. 이곳에서 은행업무의 대부분을 익혔던 문상철씨는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요즘도 행원들에게 『어디든지 가라. 그리고 거기서 배우라』고 충고하고 있다.
동경에서 시험을 치르고 평양지점에 발령을 받은 김성환씨(현 한은 총재)는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그때 평양지점에는 허민수씨(한은 초대 수석부총재·신탁은행장역임)가 지배인대리로 있었다. 허민수씨는 구용서씨 다음으로 빨리 대리로 승진됐던 분으로 동양화·낚시·시조 등을 즐기는 풍류객이었다. 나중에는 유창순씨(현 롯데제과회장)도 평양지점으로 왔는데 이분들도 모두 당시의 편견과 한국인차별이 특히 심했던 일인지배인 때문에 정신적인 고통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홧김에 대동강에 나가 술도 많이 마셨다는데 어떤 때는 대동강에 띄운 놀잇배에서 출퇴근할 때도 있었다한다. 1년에 한번씩 신의주·평양·진남포 등 서도지점친목운동회가 열렸으며 이를 계기로 한국인들끼리 모여 민족적 울분을 달래곤 했다. 【안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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