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61)<제자는 필자>|<제11화>경성제국대학(15)|강성태 &해방과 함께 교명도 「경성 대학」으로 변경|47년에는 현재의 「서울대학」으로 다시 개교|일제가 세운 학교 다녔다고 욕먹은 졸업생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마지막 졸업생>
해방되던 해에 졸업한 의학부 17회 졸업생 (법문학부 18회에 해당) 에는 강중구 (개업) 김세경 (우석 의대 학생) 노종문 (개업·이비인후과) 임창제 (개업) 함용주 (개업·냇과) 소주영 (개업) 이정호 (개업·냇과) 이영호 (개업·이비인후과) 정인호 (개업·냇과) 홍성규씨 (개업) 등이 있었다.
43년부터는 예과의 수업 연한이 다시 2년으로 줄어들었다.
그 당시 유희춘 (전 제일제당 사장) 이보형씨 (서강대 교수) 등과 함께 예과에 다니던 언론인 천관우씨는 「예과의 노래」현상 모집에 응모, 당선되는 등 문제를 나타내기도 했다.
해방과 함께 경성대학으로 교명이 번경되고 47년에는 서울대학교로 다시 교명이 변경되었으나 서울대학교는 일본 정부가 세운 경성제대의 후신이 아닌 대한민국이 세운 대학이라는 곳에서 47년을 개교한 해로 삼았다.
그러나 현재 서울대 동창회에는 경성제대를 비롯, 법전·의전·고공·고상 졸업생까지 포함시키고 있어 국립대학으로서 경성제대의 후신임을 부인하지는 못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초기 졸업생은 경성제대 입학생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해방 후 일본·만주 등 해외에 나갔던 유학생들이 귀국 편입함으로써 이들도 많이 끼여 있었다.
순수한 경성제대 입학생만으로 볼 수 있는 경성대학 졸업생에는 법문학부에 전기선 (성균관대 교수) 김명윤 (변호사) 김형수 (체신부 차관) 정희철 (서울법대 교수) 한건숙 (한양대 교수) 서돈각 (서울법대 학장), 의학부에 김기수 (서울 시립 서대문 병원장) 김희섭 (이화의대 교수) 나건영 (서울 의대 교수) 노재성 (개업·신경 정신과) 변선규 (개업·냇과) 서광륜(개업·정형 욋과) 서순규 (우석의대 교수) 선우상 (개업) 안수벽 (서울 성동 보건 소장) 이문호 (서울의대 교수) 최현 (가톨릭 의대 교수) 한기수 (개업·정신 신경과) 허인목씨 (서울 의대 교수) 등이 있었다.
이 밖에 서장석 (경기 중고 교장) 최형규 (전 문교부 차관) 김익권 (육대 총장) 나상조 (가톨릭 신부) 이기영 (영남대 교수) 장세헌 (서울대 문리대 교수) 정재구 (제일제당 사장) 권이혁 (서울 의대 학장) 김종설 (국립 의료원 내과 과장) 김정근 (우석 의대 교수) 김교명 (인천 제일 병원) 정두영 (서울 서대문 보건 소장) 김정진씨 (한일 병원) 등 서울대 1회 졸업생과 이명구 (성균관대 교무처장) 정호영 (개업) 최원로씨 (개업) 등 2회 졸업생을 비롯, 4, 5회 졸업생까지 경성제대 입학생이 있었다.
이 「시리즈」가 계속되는 동안 여러 통의 전화와 편지가 보잘 것 없는 글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기도 했으나 그 중에는 『일본놈이 세운 대학을 장황하게 소개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비판도 있었다. 경성제대 출신들이 이력서에 기입하는 것을 꺼릴 정도로 일반의 오해를 받아 있는 감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일제하에서 뚜렷한 투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3·1 운동 당시 2백50명이던 경성고보 (현 경기중) 17회생이 졸업할 때는 망명이나 투옥 (예 이범석씨) 등으로 73명밖에 남지 않았다는 실례도 있지만 관립 학교 학생들이 일인과 접촉하면서 이념적인 투쟁을 계속했다는 것은 누구나 부인 못할 사실이다.
앞서 소개한 성대 반제 동맹 사건 이외에도 김성환 원흥균 박원선씨 등을 중심한 기독 동우 구락부의 활동 등 꾸준하게 이면 투쟁을 계속했다.
당시의 학생과 현재의 학생을 비교하면 식민지 정치하의 당시 학생은 정치적인 차별 대우 속에서 현실 도피적인 사고 방식을 벗어나기 어려웠고 게다가 나이가 들고 처자를 가진 학생이 대부분이어서 술 마시고 기생집 다니는 것을 다반사로 알았다. 이 같은 상황 아래서도 놀고 공부하는 것을 엄격히 구별, 일인에게 지지 않겠다는 민족 감정에서 열심히 공부, 모두가 중간 이상의 성적을 차지했으며 이 같은 노력은 입학할 때부터 어려움을 극복했고 나라를 찾을 때 유익한 인재가 되겠다는 생각 아래서 이룩된 것이다.
호연지기를 기르겠다고 밤새도록 마시고, 젊음을 발산한다고 「스크럼」을 짜고 종로와 충무로를 누비었고 세종로 네 거리에서 소변을 보기도한 당시 학생들의 기개와 분위기는 지금와서는 볼 수 없는 것이지만 이같은 행동이 대학생이 워낙 적어 사회의 인정을 받던 시절의 이야기이고 나라가 없어 좌절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의 일이고 보면 현재의 대학생과 비교 한다는 것은 믈론 어려운 일이다.
비교적 정돈된 교육 제도 아래에서 교육을 받고 역량만 있으면 얼마든지 뻗어 나갈 수 있는 요즘 대학생들은 되찾은 나라를 내가 짊어진다는 각오 아래 지난날의 학생보다 더욱 노력하는 학생이 되어 주기를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다.
전혀 기록이 없는 당시의 이야기를 쓰는 데는 박건원 이종수 박충집 박용익 김석환 김성환 현석호 유홍렬 고재호 계창업 서장석 박직영씨 (경기중 교사) 등 여러 동문의 협조가 있었다는 것을 부기 해 둔다. <끝>
◇다음은 안명환씨 (초대 은행 감독 부장)의 조선은행.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