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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만 명 전교조, 9명 위해 법 밖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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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김정훈 전교조 위원장이 21일 오전 서울 영등포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조합원 총투표 결과에 따른 향후 일정 등을 밝히고 있다. [뉴스1]

1989년 설립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은 99년 합법 노조의 지위를 얻을 때까지 적지 않은 시련을 겪었다. 설립 과정 등에서 해고된 교사만 1500여 명(대부분 나중에 복직)이었다. 이런 전교조가 14년 만에 합법 노조의 지위를 잃을 상태에 놓였다. 표면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2004년 이후 해직된 9명의 교사 출신 노조 전임자다. 전교조 규약은 해고된 교사를 노조원으로 그대로 인정하고 있지만, 현행 노동조합법은 근로자가 아닌 사람의 가입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한 달 전 고용노동부는 이달 23일까지 해직자를 노조원으로 인정하는 규약을 개정하지 않을 경우 전교조에 대해 “노조로 보지 않는다는 것(법외노조)을 통보할 수밖에 없다”며 시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전교조는 지난 18일 조합원 총투표를 통해 규약 개정을 거부(68.6%)하기로 했다. 21일에는 기자회견까지 열고 현 정부에 대한 총력투쟁 방침까지 밝혔다. 6만여 명의 조합원을 거느린 노조가 9명의 해직자를 위해 법 밖의 길을 걷겠다고 나선 것이다.

 전교조가 법외노조를 감수하면서까지 규약 개정을 거부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교조가 법외노조가 되면 전교조 본부·지부에서 일하는 현직 교사 출신 전임자 76명은 전원 학교로 복귀해야 한다. 교육부 최성유 교원복지연수과장은 “고용노동부가 법외노조 통보를 하는 대로 전임자들에게 복귀 명령을 내리고 거부할 경우 징계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단체교섭권도 사라진다. 교사 급여에서 원천징수하던 조합비(본봉의 0.8%)도 앞으로는 계좌이체 등을 통해 직접 걷어야 한다. 재정적인 타격도 상당하다. 새누리당 박성호 의원실이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교육부와 시·도 교육청은 현재 전교조 본부와 16개 시·도 지부 사무실의 임차보증금으로 51억원을 지원하고 있다. 이와 별도로 연간 5억6000만원 정도의 지원금도 받고 있다.

 그럼에도 전교조가 정부의 시정요구를 거부한 것은 정부에 대한 불신과 “더 밀릴 수 없다”는 위기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2003년 9만3860명이었던 전교조 조합원 수는 이후 감소세로 돌아서 올해 5만9828명까지 줄었다. 특히 전체 조합원 중 20대 조합원의 비율은 2.6%에 불과하다. 익명을 원한 전교조 서울지부의 관계자는 “노조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다 보면 해직자가 생길 수밖에 없는데 이들을 버리고 가서는 전교조의 미래가 없다”고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을 한 김정훈 전교조 위원장은 “고용부가 법외노조라고 통보해 오면 가처분소송과 무효소송 등을 내고 국제노동기구(ILO)와 유엔 인권이사회 등에도 부당함을 호소하겠다”며 “교육부의 전임자 복귀 명령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전교조 소속 평교사는 내부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투표 시작 전만 해도 해직자를 노조에서 탈퇴시키되 다른 방법으로 전교조에서 계속 활동하도록 하자는 의견이 절반 가까이 됐다. 하지만 고용부와 교육부가 강경한 태도를 보이면서 ‘규약을 개정한다고 해서 이번 사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이번 전교조의 결정을 바라보는 학교 현장의 부정적 시각도 있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 교장은 “과거 나이스(NEIS)나 국가수준학업성취도 평가 등으로 정부와 전교조가 정면 충돌할 때도 전교조 교사들의 조퇴 등으로 수업에 어려움이 많았다. 결국 피해는 아이들이 보게 된다. 양쪽이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경희대 김중백(사회학) 교수는 “전교조가 요구하는 ‘참교육’도 제도와 법 테두리 안에서 가능한 것”이라며 “지나친 강성화가 내부 결속에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일반 국민과는 오히려 더 멀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번 법외노조 문제로 전교조의 위상이 시험대에 오를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전교조가 합법 노조의 지위를 잃는 것을 계기로 내부 결속을 강화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면 단결력과 위상이 급속히 추락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번 조합원 총투표에서 노조 규약 개정에 찬성한다는 의견도 28.1%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익명을 원한 노사문제 전문가는 “전교조 입장에선 해직자를 외면할 수 없고 박근혜정부도 ‘법을 준수한다’는 명분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해법이 마땅치 않다”며 “노조 지위를 둘러싼 갈등과 공방이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한길 기자

◆법외노조=노동조합법이 정한 요건을 갖추지 않아 합법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노조를 말한다. 법외노조는 ‘노동조합’이란 이름을 쓸 수 없고, 단체협약 교섭권·노조전임자 파견권 등의 권리가 제한된다. 근로자가 법외노조에 가입하는 것 자체는 불법이 아니지만 파업 등 단체행동에 나설 경우 처벌을 받을 수 있다.

내일 법외노조 여부 결정
정부지원금 51억 반납하고 전임자 76명 전원 복귀해야
전교조 "ILO·유엔에 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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