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예술을 위한 예술'은 그만 … 문제는 감동이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2면

영혼의 미술관
알랭 드 보통·존 암스트롱 지음
김한영 옮김, 문학동네
240쪽, 2만8000원

몇 달 전 한 출판사로부터 ‘추천사’를 의뢰받았다. 하지만 추천사는 내가 가장 꺼리는 장르. 정중히 사양하며 대신 파일로 보내준 책을 읽어 보고 가치가 있으면 리뷰를 쓰겠노라고 약속했다. 파일을 열어보니, 국역본이 아닌 영어본이다. 그 사이에 우리 말로 번역된 책은 ‘치유로서 예술’(Art as Therapy)이라는 원제 대신에 ‘영혼의 미술관’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달고 나왔다. 저자는 그 유명한 알랭 드 보통과 존 암스트롱이다.

 “왜 이런 생각을 못 했지?”

 책을 펼치자마자 든 생각이다. 우리는 “예술이 가치가 있다”는 말을 자명한 사실로 전제하면서 예술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소용이 있는지 묻지도 않는다. 걸작이라 불리는 작품이 내게 아무 감동도 주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저 작품 같지도 않은 작품이 그토록 평가되어 상상을 초월한 고가에 팔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구나 떠올릴 만한 이 당연한 질문들을 우리는 그 동안 던지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예술에 관한 담론이 ‘예술계’라는 곳에 독점돼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예술계는 모든 이를 위해 공정한 판단을 내려주는 중립적 사회가 아니다. 그 역시 이론과 이념에 오염되고, 시장과 권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특수한 사회일 뿐이다. 그 특수한 집단이 예술에 관한 질문을 독점하다 보니 대중과 예술 사이에는 괴리가 생길 수밖에. 결국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말할 줄 아는 아이의 천진난만함이다.

예술에는 일상의 소박한 가치를 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는 이 점에서 위대하다. 삶의 순간순간을 어떻게 기념해야 하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베르메르의 ‘편지를 읽는 푸른 옷의 여인’. 1657년 무렵. [사진 문학동네]

예술은 어디에 소용되는가. ‘치유로서 예술’은 그것을 일곱 가지로 요약한다. 예술은 불완전한 기억을 보충해주고, 이상세계에 대한 희망을 표현하고, 삶의 슬픔을 격조 있게 처리하게 해주며, 정서적 불균형을 회복시켜 준다. 예술 속에서 우리는 자기를 인식하고, 공포나 불쾌를 불러일으키는 낯선 것과 대면함으로써 정신적으로 성장한다. 나아가 예술에 힘입어 우리는 세상을 더 예리하게 보고 사물의 가치를 더 잘 평가하게 된다.

주목할 만한 점은 저자들이 현대예술을 절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술계는 작품을 평가할 때 으레 현대예술의 기준을 적용한다. 현대예술이 ‘아름다움’ 대신에 ‘충격’을 추구하다 보니, 오늘날 ‘예쁜’ 그림은 종종 시대에 뒤떨어진, 예술을 모르는 대중에 영합하는 ‘키치’(kitsch)로 간주되곤 한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예쁜 그림을 좋아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세상이 아름답기를 바라는 희망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현대예술의 기준으로 보면 현실의 이상화는 거짓말을 의미한다. 그래서 현실을 아름답게 이상화한 안젤리카 카우프만의 작품보다는 현실의 추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게오르크 그로스의 작품이 높이 평가된다. 하지만 안젤리카 카우프만이 설마 현실이 냉혹하다는 것을 몰랐겠는가. 그는 삶에서 누구 못지않게 고통을 받았다. 그가 그 잔혹한 현실을 이상화한 것은 더 나은 세계를 바라는 절실한 염원으로 봐야 한다.

예술계는 작품을 읽는 데에 ‘독자적인’ 방식을 갖고 있다. 첫째는 기술적 독법이다. 가령 예술계가 다 빈치를 높이 사는 것은 그가 최초로 ‘스푸마토’ 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이고, 브라크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가 최초로 다시점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기술적 성취는 정작 대중이 예술을 향유하는 이유와는 사실 별 관계가 없다. 여기서 예술계라는 특수한 사회와 일반 대중 사이의 괴리를 엿볼 수 있다.

알랭 드 보통

 정치적 독법에 따르면 영국 풍경화가 토머스 게인즈버러(1727~1788)의 ‘앤드루 부부’는 당시 토지 소유관계를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가치가 있고, 역사적 독법에 따르면 리알토 다리를 그린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 비토레 카르파초(1460~1516)의 그림은 1500년경 베니스 건축에 관한 정보와 당시의 제례의식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기에 가치가 있다. 또 충격-가치 독해에 따르면, 영국 화가 크리스 오필리(45)의 ‘성처녀 마리아’(1997)는 그림에 코끼리 똥을 바름으로써 우리의 고정관념을 깼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하지만 이 네 가지 전문가 독법은 실제로 대중이 예술을 향유하는 방식과는 별 관계가 없다. 대중은 위에서 언급한 일곱 가지 기능을 위한 ‘도구’로 예술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사실 예술계에 속하는 사람들은 전체 인구 중의 극소수이며, 예술의 소비자 중의 절대 다수는 일반 대중이다. 그런데 왜 그들이 예술을 향유하는 방식은 배제되거나 무시돼야 하는가. 이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 저자들은 예술에 대한 새로운 독법을 제시한다.

 그들이 제안하는 제5의 독법은-비트겐슈타인 철학을 그렇게 보았듯이-예술을 치유로 바라보는 것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예술은 우리의 부족함을 보충해주기 위한 도구다. 인간은 결함이 많은 존재다. 그는 부정확한 기억을 갖고 있고, 현실에서 쉽게 절망하며, 종종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누구나 지나친 면을 갖고 있고, 자신을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으며, 낯선 것을 본능적으로 싫어하고,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이 때문에 우리에게는 예술이 필요하다. 사람들의 예술취향이 그토록 다양한 것도 그와 관련이 있다. 각자 자기에게 부족하다고 느끼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각자 부족하다고 느끼는 점을 보충하기 위해 각자 다른 종류의 예술을 치유의 도구로 사용한다. 누가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고 했던가. 예술은 결국 삶을 위한 것. “예술의 궁극적 목적은 예술작품이 조금 덜 필요한 세계를 건설하는 데에 있어야 한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 문화비평가. 미학자. 서울대 미학과(석사)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미학과 언어철학을 공부했다. 저서 『생각의 지도』 『미학 오디세이 1~3』 등.

예술은 우리를 어떻게 치유하나
알랭 드 보통이 말하는 키워드 7

1 기억

미술은 경험을 보존하는 방식이다. 우리 주변에는 일시적이고 아름다운 경험이 많은데, 그런 경험을 마음에 담으려면 도움이 필요하다. 예술은 경험의 결실을 기억하고 재생할 수 있게 해준다. 예술은 소중한 것, 우리가 찾은 최고의 통찰을 좋은 상태로 유지하는 메커니즘이며, 그것들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2 희망

만일 세상이 좀더 따뜻한 곳이라면, 우리는 예쁜 예술작품에 이렇게까지 감동하지 않을 테고, 그런 작품이 그리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예술적 경험의 가장 이상한 특징 중 하나는 가끔 눈물을 흘리게 할 정도로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예술의 힘이다. 그런 순간은 특별히 우아하고 사랑스러워 보는 즉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작품과 마주칠 때 찾아온다.

3 슬픔

슬픈 일들이 더 슬퍼지는 건 우리가 혼자 슬픔을 견디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카스파르 다피트 프리드리히의 ‘해변의 암초’) 그림은 우리의 인간관계나, 일상의 스트레스와 고난을 직접 가리키지 않는다. 작품은 슬프다기보다 음울하고, 고요하지만 절망적이지 않다. 예술은 인간의 조건인 고난을 웅대하고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한다.

4 자기 이해

예술은 나 자신에게 매우 중요하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게 해준다. 인간의 많은 부분은 언어로 쉽게 표현할 수 없다. 우리는 아트 오브제를 집어 들고 혼란스럽지만 강한 어조로 말할 수 있다. "이게 나야.”

5 균형

예술은 이미 충분하다고 섣불리 추정해서는 안 되는 균형과 선함을 시의 적절하게, 본능적으로 깨닫게 해줌으로써 우리의 시간을, 삶을 구원한다.

6 성장

예술작품에는 타인의 경험이 대단히 정교하게 축적돼 있으며, 잘 다듬어지고 조직된 형태로 우리에게 제시된다. (중략) 많은 예술이 처음에는 ‘남의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순간 우리 자신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생각과 태도가 그 안에 담겨 있음을 발견한다.

7 감각

우리의 주된 결점, 우리를 불행에 빠뜨리는 원인 중 하나는 우리 주위에 늘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데 있다. 예술은 우리의 껍질을 벗겨내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을 버릇없이, 습관적으로 경시하는 태도를 바로잡아준다. (중략) 예술에는 파악하기 어려운 일상의 진정한 가치에 경의를 표하는 힘이 있다.

관련기사
▶ 희망과 비극의 그 땅…『아프리카 대륙의 일대기』
▶ 소설처럼 읽는 여자 프로 골퍼…『맨발의 투혼…』
▶ '작가들의 작가' 줌파 라히리…『축복받은 집』
▶ 인간학…이기주의는 끝났다『펭귄과 리바이어던』
▶ 위협받는 식물 다양성…『식물의 왕국』外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