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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제10화>양식 복장(9)|이승만(제자는 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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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쓰개치마와 양산>
특수 계층의 양장 여성을 제외하면 일반 여성의 경우, 양식화는 아무래도 학생들이 그 앞장을 선다. 그러나 남 학도들이 모자로부터 양식 복장을 갖췄던데 비하면 여 학도들의 그것은 굉장히 늦고 더디다.
내가 소학교 때 쇠북(양식소고)을 앞세워 치면서 활기 있게 원족을 나가고, 또 각 학교가 삼선 평에 모여 운동회를 할 무렵, 여 학도들이 학교를 가려면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 간혹 어린 학생들 중에는 그것을 벗기 시작했지만, 쓰개치마가 다 없어지기까지는 한참 걸렸다.
19세기말부터 세워진 「프랑스」어·독일어·「러시아」어·일어 등 외국어 학교를 필두로 하여 초기의 교육기관에서는 교복을 급여하면서 입학을 권장하였다. 물론 한복이다. 20세기에 들어서까지 여 학도들에게는 대개 다홍저고리·다홍치마를 많이 해 입혔다. 그러나 학생수가 점점 늘어나는 데다가 국내 정세가 어지러워 학교에서 교복 급여를 못하게 되면서 여 학도들의 치마·저고리에서 빨간 빛깔이 현저히 감소되고 대신 검정 색이나 회색으로 변모해갔다.
여기서 한가지 밝혀두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쓰개치마에 관한 것이다. 흔히 장옷은 양가집 사람이 쓰는 것이고, 치마로 대용하는 것은 상민이나 하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 정반대이다.
전날에 광화문에서 배우개에 이르는 윗녘주민은 「우댓사람」이라 일컬었다고 이곳 주민에게는 상인이 많은 고로 부녀자들도 자주 나들이를 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부대에 사는 부녀자들은 외출용 얼굴 가리개가 있는 것이요, 그것을 장옷(장의)이라 부른다. 이 쓰개는 곧 전통적인 상비 쓰개이기 때문에 각기 곱게 치장하여 쓰며 옥색에다 다홍 끝동을 대는 등 사치로 왔다.
하지만 반촌 양가집 부인들은 나들이를 할 필요가 없고 또 해서는 흉이다. 정이야 출입할 경우라면 가마를 타는데, 구차한 살림으로 가마 탈 형편이 못되면 치마를 응급조처로 쓰고 나서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양가집 부녀자가 장옷을 쓰면 이상해도 치마를 쓰는 건 조금도 흉 되지 않는다. 여 학도들이 장옷을 안 쓰고 쓰개치마를 쓴 것은 역시 그런 이유 때문인 것이다.
이와 유사한 쓰개로는 처네가 있는데 서울에서는 강가의 부녀자들이나 썼을 따름이다. 강 마을의 아낙네들은 처네를 쓴 채 생선이나 젓갈을 이고 문안을 드나든 것이다. 그밖에 평양이나 해주 기생들은 삿갓과 전무도 썼다.
이러한 쓰개 종류는 양산이 소개되자 저절로 변천돼갔다. 초기의 양산은 지금의 박쥐 우산인데 여성들이 얼굴을 가리기 위하여 볕이 쨍쨍한 대낮에 많이 사용됐다. 바꿔 말하면 해 가리와 내외의 겸용이었던 것이다. 1900년 들어서 우산은 학생들에게 주는 상품으로서 제1급에 들었다. 외국어 학교의 우등생 72명에 대하여 왕이 직접 상을 내릴 때에도 상품은 양산·자오 종·필통·연필·공책 등이었으니 말이다. 그만큼 우산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중요한 일용 품목에 들었다.
그것도 초기는 지금의 박쥐 우산이 아니다. 등나무로 살을 만들어 광목을 씌운 위에 기름을 먹인 중국 제품이 먼저 보급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한 것이 나마 박쥐 우산의 형태를 갖춘 것은 합방 직전부터 일본 사람들이 먼저 선보였다. 한국 여성들이 쓰개치마 대신 우산을 받쳐들기 시작하기는 1913년께부터라고 생각되는데 처음에는 일률적으로 검은 천이었고 차차 회색도 드문드문 나타났다. 지 우산이 발전된 것도 이와 같이 일반의 수요가 격증된 것과 시기를 같이 한다.
여성들의 내외가 차차 풀리면서 우산은 해를 가리는 면에서만 사용되었으며 빛깔도 흰색을 비롯하여 노랑·분홍 등 사치하게 선택돼 갔다. 그 중에도 멋을 부리려면 분홍이었기 때문에 「홍일 산」이란 용어가 생겼고, 그것은 서양식을 따라 폭은 좁고 자루만 기다란 것이었다.
이러한 유행의 첨단은 여염집 부녀자들로서는 미처 내딛지 못하는 경지요, 사회적 처신이 용이한 기생이나 홍일 산을 흔히 썼다.
당시 사회 형편에서 기생이 유행을 먼저 흡수하고 발단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권력자나 부호의 소실(첩)이 되어 유행을 민감하게 나타내고, 그러면 그에 시샘하여 본실도 짐짓 그런 유행을 흉내 내보는 것이 유행이 파급되는 정상 「코스」였다.
이 시절엔 「하이칼라」들이 여름이면 검은 우산을 받쳐들기도 했다. 한때 여 학도들 사이에 내외용 가리개로서 검은 우산이 이용되긴 했으나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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