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제10화>양식복장(3)이승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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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별기군의 안팎>
별기군은 구식 군대 중에서 또렷또렷한 장정들을 발탁해 구성했겠지만 전투하는 병정은 못되었다. 그들의 옷차림이 신식이듯이 위관(장교)은 칼집도 번들번들 하는 군도를 차고, 사병은 조총을 들었다. 총열이 제법 긴 조총은 화약을 재어 가지고 불로 지져야 나가는, 그때로선 신병 기이다. 하지만 신식병정이 그 총을 가지고 싸웠다는 얘기는 들은바가없다.
내가 성장해서 자주 병 문 언저리나 길거리에서 본 신식병정은 어린 시절에 꿈속에 키워온 그런 멋진 모습이 아니었다. 신식이 좋다니 그저 화초 삼아 두었다면 몰라도 도무지 그게 뭘 하는 병정들인지 알 수 없었다. 가끔 조련을 받는 모양이었으나 늘 할일 없이 빈둥거렸다.
그런 대로 볼품이 의젓한 위관이지만 역시 하는 행실은 개차반이었다. 종종 길거리에서 부하 병정에게 이불 짐을 지워 어슬렁어슬렁 뒤따라가는 위관을 보게된다.
바로 초전골-지금의 초동갈보 집으로 번을 들러가거나 다녀오는 길인 것이다. 군인은 으례 병 문안에서 당직근무를 하게 되었을 텐데, 어찌된 판국 안지 공공연히 초전 골로 향하는게 일과인성 싶었다. 그래도 낯이 뜨겁든지 이불 짐 뒤에 숨어 머슥머슥 따라가는 꼴이란 가관이 아닐 수 없었다.
일반사병의 소일거리는 또 달랐다. 옹기종기 모여 고누 두기를 하는 것이 매양 보는 풍경이다.
혹은 토수 짝이나 두꺼운 마분지를 둘둘 말아 세운 것을 중심으로 빙 둘러앉아 콩 짝이나 싸리나 부 토막을 쪼개만든 윷을 논다.
행여 내기 두기라도 하면 그 길로 곧장 모주 집으로 빠져 모주 타령이었다. 오죽해서 「모주 병정」이란 별칭까지 생겼을까.
그들은 곧잘 사회계층의 가장하치 막벌이꾼들과 어울려 지냈다. 혹 부잣집 잔심부름 해주거나 기생의 시중이라도 사양하지 않았다. 심지어 계집을 소개해주는 뚜장이 노릇까지 했다. 그렁저렁 소일거리조차 영없을 때는 담장 밑에 쭈그리고 앉아 이 사냥질을 하는 꼴불견이었다.
별기군의 양복은 홑겹이기 때문에 추운 겨울이면 정말 볼꼴 사나왔다. 요즘 같이 내의가 있던 시절도 아니다.
방한을 위해서는 부득불 솜 두더기를 속에 껴입기 마련이라 비둔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니 자연 옷소매와 바지 가랑이가 팽팽하게 부어 올라 양복태도 나지 않으려니와 옷이 껑충 찍어 붙음에 따라 팔목과 정강이에는 때가 꼬작 꼬작한 속옷이 허옇게. 드러나는 것이었다.
양복바지는 슬 갑이라 일컬었다. 무릎을 감추는 옷이란 말이다. 양복은 앞섶 가림이 돼있지만 솜바지를 속옷으로 입는다고 해서 거기에 앞섶 가림을 해 놓았을리 만무하다. 병정들은 소피(소변)를 치를라치면 온통 슬 갑의 허리춤에 띠까지 풀어 재치고 고의춤을 잔뜩 까 내리고 볼일을 보고했다.
이런 병정들의 꼬락서니이니「별기」는 커녕 무슨 놈의 전투를 할까싶어 한심한 생각이 앞설 정도였다.
이러한 별기군보다 훨씬 늦게 1901년에 조직된 군악대는 신식 병정인 점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군악대는 별기군과 여러 모로 대조적이다.
국악 대를 처음 조직하여 가르친 사람은 우리 나라 황실의 초청으로 내한한 독일인「프란초·에케르」이다. 정부는 그를 초빙함과 동시에 큰북·소북·「코네트」·「클라리네트」등 양악기를 들여와 10여명의 악대를 편성한 젓이다.
이들이 시가에서 연주하는 일은 거의 없고, 한일 합방 전에는 주로 궁중에서 기거하면서 연회 때에만 나갔으리라 생각된다.
그들의 복장은 별기군과 똑같은 격식의「프랑스」군복인데 빛깔이며 장식이 여간 화려하지 않았다. 검정 웃도리에 빨간 바지였는데 웃도리 어깨에는 휜 줄이 칭칭 감기고 소맷부리는 빨간 테가 두툼했다.
바지 골에는 반대로 검정 줄을 쳤고 군 모에도 빨간 테가 둘려있었다. 대장은 중부골(지금 장사동)사는 백우용이었는데 키가 작달막한데다 얼굴이 예쁘장하여 그 명성이 장안에 가득 찼었다. 별기군 병정은 아예 품위를 따질 주제가 못되지만, 군악대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 나라에선 맨 처음 양 악보를 보며 악기를 연주한 사람들이니 만큼 교육수준도 높은 개화한 사람들이다.
뒷날에 그들은 우미 관·동양극장 같은 데의 악사로 흩어져 중추「멤버」로서 활약이 컸다.
한일 합방 후 이왕직 양악대로 개편되면서 비로소 그들의 모습은 시민에게 공개되었다. 매주 토요일이 되면「파고다」공원의 후문 쪽에 있던 바가지 같은 집(반월형 음악당)에서 옥외 연주를 가졌던 것이다. 그때에도 음악당 옆(전 종로시립도서관자리)에 병사와 같은 숙소가 있어 합숙하며 연습했다가 토요일 저녁때면 붐바라 붐바라 하고 행진곡과 원무곡 등을 들려주었다.
양악대의 청중은 대체로 서양사람에 한정됐다. 보통 사람들은 요일관념이 없을 때이고 또 들어도 모르니 기웃거리다간 흩어졌고, 늙은 기생아범들이나 할 일 없이 소풍하다가 청중을 구경하는 것으로 시간 보내는 정도였다. 다만 서양인들만은 한 곡이 끝나면 박수도치고 열성이었는데 아마 그것으로 향수를 달랬을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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