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번은 속물이 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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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호 28면

니콜라이 고골(Nikolai Gogol, 1809~1852) 우크라이나 태생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의 중세사 교수가 됐으나 자신의 자질에 회의를 느끼고 1년 만에 그만두었다. 『검찰관』 발표 후 보수 진영의 공격에 시달리다 로마로 피신, 6년간 생활하며 대표작 『죽은 혼』을 집필했다. 죽기 전 10년 동안 만족스러운 작품을 창작하지 못하고 극단적인 금욕생활을 하다 반미치광이로 생을 마감했다.

가끔은 웃음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럴 때 가볍게 집어 드는 것이 니콜라이 고골의 단편소설들이다.

박정태의 고전 속 불멸의 문장과 작가 <45>『검찰관』과 니콜라이 고골

고골의 작품에는 다양한 웃음들이 들어있는데, 유머가 가득 담긴 풍자적인 웃음이 있는가 하면 깊은 여운을 남기는 냉소적인 웃음도 있다. 도스토옙스키가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고 한 『외투』를 읽다 보면 비극을 동반하는 슬픈 웃음을 발견한다.

포복절도할 정도로 한바탕 웃고 싶다면 5막짜리 희곡 『검찰관(Revizor)』이 그만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부패한 관리들이 보여주는 온갖 거짓과 오버액션으로 일관하는 이 작품에는 고골 특유의 눈물을 자아내는 웃음과 도덕적 풍자가 한껏 들어있다.

작품 맨 앞에 나오는 부제 ‘제 낯짝 비뚤어진 줄 모르고 거울만 탓한다’는 러시아 속담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암시하는데, 먼저 줄거리를 따라가 보자.

주인공 흘레스따꼬프는 러시아의 어느 작은 도시로 오는 도중 도박으로 여비를 다 날리는 바람에 숙박비와 식비를 지불하지 못해 여관을 떠나지 못하는 신세다. 그런데 마침 이 도시에는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암행 검찰관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진 터라 그는 예기치 않게 고위 관리를 사칭하게 된다.

스물세 살의 14급 최말단 관리인 흘레스따꼬프는 워낙 속임수에 능하고 거침없이 거짓말을 쏟아내며 과장과 허풍이 넘쳐나는 인물이다. 그러다 보니 그 지방의 시장과 판사, 교육감, 지주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은 그를 대단한 권력자로 여기고 연회를 베푸는가 하면 뇌물 공세에다 온갖 아첨을 떠느라 여념이 없다.

흘레스따꼬프는 한술 더 떠 시장의 부인과 딸을 차례로 유혹하고 급기야 딸에게 청혼까지 한다. 시장은 고위 관리를 사위로 맞게 된 것을 자랑하며 자신을 고발한 사람들에게 앙갚음할 것을 다짐하지만 엄청난 사기극을 저지른 흘레스따꼬프는 두둑이 챙긴 뇌물을 갖고 홀연히 사라진다. 흘레스따꼬프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비로소 그의 정체를 알아차린 시장과 부패한 관리들은 뒤늦게 분통을 터뜨리고, 마지막 순간 헌병이 나타나 진짜 검찰관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경악한 채 일제히 굳어버린다.

이렇게 작은 오해에서 비롯된 거짓말과 사기극이 급기야 엄청난 스캔들로 확대되지만 이건 흘레스따꼬프 혼자 꾸민 일이 아니다. 흘레스따꼬프가 처음부터 대놓고 속이려 든 것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오히려 그동안 불법과 부정을 일삼았던 그 지방의 무능한 관리들이 지레 겁을 먹고 그를 암행 검찰관이라고 믿어버렸던 것이다.

여관 주인이 식사를 제공하지 않자 굶주린 흘레스따꼬프는 다른 손님이 먹는 연어 요리를 탐욕스럽게 들여다보는데, 지주의 눈에는 이런 모습이 거꾸로 주도면밀한 검찰관의 날카로운 눈초리로 비춰진다. “정말로 그 사람이에요. 관찰력이 강해 보였고, 모든 것을 죽 훑어보는 눈치였습니다. 저는 심한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당황해서 횡설수설하는 흘레스따꼬프의 말투는 상대의 허점을 잡아내기 위해 일부러 둘러대며 빈틈을 보여주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오, 재치 있는 농담이네! 별 수작 다 걸려고 들어! 어지간히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겠는걸.” 그런가 하면 여관비를 내지 않아 잡혀가는 줄 알았던 흘레스따꼬프가 마구 쏟아내는 비난과 불만은 시장의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과 분노로 해석된다.

『검찰관』은 이렇게 관료주의 세계의 가면과 위선을 폭로한 신랄한 풍자극이다. 이 작품은 황제 니콜라이 1세의 특명으로 1836년 4월 19일 무대에 처음 올려졌는데, 귀족들과 함께 연극을 관람한 황제는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모두들 멋있게 두들겨 맞았어. 그러나 누구보다도 호되게 얻어맞은 것은 황제인 나야.”

나 역시 이 작품을 읽을 때마다 아주 세게 두들겨 맞는다. 흘레스따꼬프의 정체를 알아차린 시장이 노발대발하며 미칠 듯이 발작을 해대는 장면에서 특히 그렇다. “보라, 온 세상 사람들아! 모두들 이 시장이 어떻게 바보가 되었는지 똑똑히 봐라! 나는 바보다. 바보!”

시장은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향해 주먹을 휘두른다. 온 천지에 웃음거리가 된 게 분통 터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떠들고 다니며 박장대소할 세상 사람들에게 던지는 그의 한마디는 비수처럼 폐부를 찌른다. “뭐가 우습나? 결국은 자기를 보고 웃는 거 아닌가?”

통쾌한 웃음 뒤에 숨겨진 우리 인간 모두의 약점, 그것은 주인공의 이름을 딴 ‘흘레스따꼬프시치나’라는 단어에 들어있는데,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거짓말을 일삼고 뇌물을 좋아하면서도 겉으로는 그런 척하지 않는 전형적인 속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렇다. 고골의 말처럼 단 몇 분 혹은 단 한순간일지라도 누구나 인생에서 한번은 흘레스따꼬프가 된다. “살아가면서 한 번도 흘레스따꼬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말재주가 좋은 근위사관도, 정치가도, 죄 많은 우리 작가들도 때로는 흘레스따꼬프가 된다.”



박정태씨는 고려대 경제학과를 나와 서울경제신문, 한국일보 기자를 지냈다. 출판사 굿모닝북스 대표이며 북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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