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정자(精子)의 책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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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막 결혼한 아담과 이브. 불행히도 아담은 무정자증(無精子症)을 앓는다. 이브는 정자은행에 보관돼 있던 사탄의 '씨앗'을 받아 인공수정을 한다. 하지만 아기가 나오기도 전에 부부는 헤어지고 만다.

생계가 막막해진 이브는 전 남편인 아담과 정자 기증자인 사탄을 상대로 태어난 아기의 양육비를 요구한다.

법정에 선 아담과 사탄. "내 씨앗도 아니고 아기가 나오기 전 이혼했는데 무슨 책임이냐" "난 정자만 팔았을 뿐이다." 두 사람의 공방이 끝없이 이어진다.

법적 가족관계만 있는 '사회학적 아버지' 아담, 자신의 정자를 팔기만 한 '생물학적 아버지' 사탄. 꾸며낸 얘기지만 이와 비슷한 두 아버지 사이의 분쟁이 지구촌 곳곳에서 한창이다.

1978년 영국 병원에서 최초의 시험관아기가 태어난 이후 정자산업은 눈덩이처럼 커져왔다. 작은 주사기 하나 분량의 정액에 1억마리나 들어 있는 정자는 거의 무한대로 뽑아 쓸 수 있는 '생물자원'이다.

인공수정 초창기, 생물학적 아버지에게는 법적 책임이 없다고들 생각했다. 정자 제공이 상품거래쯤으로 여겨져서다. 그러나 정자산업이 번창하면서 점점 인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미국과 유럽에선 주문 택배식(式) 정자은행까지 등장했다. 희망 여성의 집에 직접 정자를 갖고 가 임신시켜 준다고 한다.

스위스 등 몇몇 선진국들은 2001년부터 정자 제공자의 신원확인을 의무화하는 입법 조치를 마련했다. 모든 아동이 자신의 생물학적 부모의 신원에 대해 알 권리를 갖고 있다고 규정한 것이다. 법원도 점점 생물학적 아버지의 법적 권리와 책임을 묻고 있다.

스웨덴에선 한 남성이 정자를 제공했다는 이유만으로 태어난 아기의 양육을 책임질 위기에 처했다. 영국에서도 며칠 전 생물학적 아버지의 친권을 인정하는 판결이 나왔다. 국내에선 병원에 냉동저장된 수정란을 두고 이혼한 부부가 서로 소유권을 주장하는 다툼이 법원의 최종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나의 생명이란/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생명의 서). 청마 유치환은 생명의 진실에 대한 갈망을 이렇게 역설적 표현으로 노래했다. 생명에 대한 경외가 필요한 시대다.

이규연 사건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