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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방 제거 결심한 화궈펑, 병원 간다며 리셴녠 만나 밀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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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호 29면

후베이(湖北)성 서기 겸 성(省)정부 주석 시절, 관내를 시찰하는 리셴녠(앞줄 왼쪽). 1954년 7월, 우한(武漢). 마오쩌둥 사후 화궈펑예젠잉과 함께 4인방 제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사진 김명호]

마오쩌둥 사망 이틀 후인 1976년 9월 11일 오전, 빈소를 지키던 총리 화궈펑이 복통을 호소했다. 배를 움켜잡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계속 들락거리자 장칭(江靑·강청)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베이징 시내 휴지가 거덜나겠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42>

병원에 가라고 권하는 사람이 많았다. 화궈펑은 마오의 시신 곁을 떠나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화궈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잠깐 나갔다 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다들 병원에 가겠거니 했다.

베이징 의원에 잠깐 들른 화궈펑의 승용차가 부총리 리셴녠(李先念·이선념)의 집을 향했다. 화궈펑은 지방 관리를 오래했다. 린뱌오 사후 마오쩌둥에 의해 권력 중심부에 진입했지만 중앙에 친한 사람이 별로 없었다.
리셴녠만은 예외였다. 후난성(湖南)성 서기처 서기 시절 재정업무를 담당할 때, 직속 상사가 전국의 재정과 무역을 관장하던 리셴녠이었다. 얼떨결에 마오의 후계자가 된 후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귀찮게 굴어도 리셴녠은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소문대로, 입도 무거웠다. 무슨 말을 해도 되돌아오는 법이 없었다.

불청객을 맞이한 리셴녠은 짚이는 바가 있었다. 거실로 안내한 후 방문을 걸어 닫았다. 화궈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래 머물 시간이 없다. 용건만 말하겠다. 마오 주석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이제 4인방과의 싸움은 피할 수가 없다. 관건은 군의 동향이다. 나는 군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 나 대신 예젠잉을 만나라. 방법과 적당한 시기를 물어봐라.” 리셴녠은 동의했다. 마오의 후계자 화궈펑의 생각이 그렇다면 해볼 만했다.

4인방 제거 후 첫 번째 휴가를 떠난 예젠잉. 1980년 여름 베이다이허(北戴河).

4인방 제거를 결심한 화궈펑이 리셴녠을 찾은 이유는 분명했다. 당시 중앙군사위원회는 베이징군구 사령관 천시롄(陳錫聯·진석련)이 장악하고 있었다.

천시롄과 리셴녠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이였다. 리셴녠 모친의 전 남편이 천(陳)씨였다. 가끔 만나면 촌수를 따지며 웃을 때가 많았다. 나란히 쭈그리고 앉아 변을 볼 정도로 가까웠다. 마오 사망 직후 함께 시신을 지킨 적이 있었다. 이날도 리셴녠이 화장실에 가자 천시롄이 뒤를 따라왔다. 리셴녠 옆에 손으로 코를 막고 다가와 속삭였다. “아무래도 저것들이 무슨 일을 벌일 속셈이니 조심해라.”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목하지는 않았다. 리셴녠이 손을 휘젓자 입을 닫았다. 두 사람은 그런 사이였다.

화궈펑과 천시롄의 의중을 파악한 리셴녠은 쾌재를 불렀다. 이틀 후 “기분이 울적하다. 샹산(香山)식물원이나 한 바퀴 돌고 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차가 식물원 근처에 오자 수행원에게 지시했다. “식물원은 다음에 가자. 이왕 왔으니 예젠잉 원수나 보고 가자.”

경비실의 연락을 받은 예젠잉은 당황했다. “도처에 4인방의 눈이 널려 있다. 공적인 자리가 아니면 만나지 말자. 무슨 날벼락 맞을지 모른다. 거처도 오가지 말자”고 한 적이 엊그제였다. 한동안 망설이다 통과시키라고 지시했다.

얼마 전 서울을 다녀간 리셴녠의 딸에 의하면,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의 첫 대화는 싱거웠다고 한다. “갑자기 웬일인가.” “웬일이라니.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나.”

거실에 정좌한 리셴녠에게 예젠잉이 물었다. “상부의 명을 받은 공적인 일 때문인가, 아니면 옛 정이 그리워 찾아왔나.” “모두 다다.” 예젠잉은 라디오를 크게 틀었다. 경극 가락이 방 안에 가득했다.

80회 생일을 앞둔 예젠잉은 청력이 신통치 않았다. 음악 소리에 뒤엉킨 리셴녠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필기구와 성냥을 챙겨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1980년, 예젠잉의 회상에 의하면 두 노인은 변기 앞에 앉아 필담을 나눴다. 한 줄씩 쓰고 소각했다. 리셴녠이 먼저 썼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을 한바탕 해야 할 것 같다.” 예젠잉이 답했다. “맞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싸움은 안 된다. 너 죽고 나 살자는 싸움이라야 한다.” 필담이 계속됐다. “방법은 네가 정해라.” 예젠잉이 고개를 끄덕이며 ‘陳錫聯’ 석 자를 썼다. 리셴녠의 대답도 간단했다. “그건 내게 맡겨라.” 젊은 시절부터 지하공작과 잔혹한 정치투쟁을 경험한 두 원로는 변기 안에 쌓인 재들을 막대기로 휘젓고선 화장실을 나섰다. 둘의 만남은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예젠잉과 리셴녠의 지지를 확보한 화궈펑은 4인방 제거에 착수했다. 마오쩌둥의 그림자나 다름없던, 8341 부대장 왕둥싱(汪東興·왕동흥)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였다. 30년간 마오의 경호를 책임졌던 왕둥싱도 4인방이라면 넌덜머리를 냈다. 진작부터 “전쟁시절 총 한 방 못 쏴본 것들”이라며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너 죽고 나 살자”는 4인방도 마찬가지였다. 9월 14일, 장칭은 화궈펑에게 전화를 걸었다. “토의할 일이 생겼다. 당장 정치국 상무위원 회의를 소집해라. 예젠잉은 부르지 말라”는 말만 하고 툭 끊어버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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