毛 사망 90분 뒤 침실 옆방서 정치국 긴급회의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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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9월 18일 오후 3시, 천안문광장에서 열린 마오쩌둥의 추도식을 주재하는 화궈펑(왼쪽 둘째), 왕훙원(왼쪽 셋째), 예젠잉(왼쪽 첫째) 등 세 명의 부주석과 장춘차오, 장칭, 리셴녠. 앞날을 예견이라도 한 듯 장칭과 왕훙원의 안색이 유난히 초췌하다. 마오 사망 직후 장칭은 ‘덩샤오핑의 당적을 박탈하자’고 주장했으나 화궈펑은 이에 반대했다. [사진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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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이 부른다는 간호사의 말을 듣자 예젠잉은 발길을 돌렸다. 옆에서 지켜본 베이징시 서기 우더(吳德·오덕)가 생생한 기록을 남겼다. “9월 8일 오후, 주석의 혈압이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밤이 되자 중앙 정치국원들이 마지막 인사를 드리기 위해 조를 짰다. 나는 예젠잉, 리셴녠(李先念·이선념)과 같은 조였다. 작별을 고하고 방문을 나서는 순간 주석이 예젠잉 원수를 다시 오라고 했다. 나와 리셴녠은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입구에 서 있었다. 고개를 숙인 예젠잉은 주석의 손을 잡았다. 마오 주석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주석은 이미 말을 못했다. 예젠잉이 고개를 더 숙였다. 잠시 그러고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의 행동은 훗날 수많은 추측을 불러일으키기에 족했다. 한동안 사실처럼 떠돌던 말이 있다. “마오 주석이 예젠잉에게 4인방을 제거하라고 생애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기도가 막혀 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예젠잉은 표정과 눈빛을 보고 주석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 세월이 흐를수록, 말 같지 않은 소리라고 말하는 사람이 더 많다.

마오쩌둥이 예젠잉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흔히들 “무한한 신뢰를 표했다”고 하지만 예젠잉이 주관하던 중앙군사위원회 업무를 천시롄(陳錫聯·진석련)에게 넘기려 했고, 중앙 정치국회의에 예젠잉을 참석 못하게 한 사람이 마오였다. 천하의 마오쩌둥도 결국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죽으면 장칭을 잘 부탁한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가 차라리 설득력이 있다.

1976년 9월 9일 0시10분, 마오쩌둥이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4인방 몰락 후 펴낸 『4인방 반당집단 범죄증거자료집(四人幇反黨集團罪證資料)』은 장칭을 악녀로 묘사했다. “마오 주석이 서거하자 다들 비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장칭은 딴판이었다. ‘오만상 찡그리지 말라’며 목청을 높였다. 기쁘다는 말까지 했다.”

마오쩌둥 추도식을 마친 후 평소 시중들던 사람들과 자리를 함께한 장칭.

부부간의 감정은 그렇다 치자. 개인적 이익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마오쩌둥의 죽음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사람은 장칭이었다. 4인방의 일원인 야오원위안(姚文元·요문원)의 구술이 더 믿을 만하다. “머리를 풀어헤친 장칭은 실성한 사람 같았다. 주먹으로 주석의 시신을 쳐대며 통곡했다. 의사들에게 ‘멀뚱멀뚱 서 있지만 말고 빨리 주석을 구하라’고 울부짖었다. 목이 상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도 힘들었다. 잠시 쉬라고 부축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처절한 모습에 너나 할 것 없이 눈물을 흘렸다.”

마오쩌둥 사망 1시간30분 후, 마오의 침실 옆방에서 정치국 긴급회의가 열렸다. 장례 문제를 토의했다. 장춘차오(張春橋·장춘교)가 유체(遺體) 보존을 주장했다. “주석의 유체를 보존 못하면 자손만대에 죄인이 된다. 인도의 네루를 봐라. 사망 후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시신이 부패했다. 결국 화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월남의 호찌민은 유체 보존에 성공했다. 월남에 도움을 청하자.” 1956년, 마오쩌둥은 “사후 화장을 허락한다”는 문서에 제일 먼저 서명을 한 적이 있었지만 아무도 화장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허구한 날 통곡만 할 수는 없는 법, 장칭은 불안이 엄습했다. 연금 중인 덩샤오핑 처리 문제를 들고 나왔다. “주석은 덩샤오핑 때문에 죽었다. 당적을 박탈해야 한다.” 화궈펑(華國鋒·화국봉)이 “마오 주석은 덩샤오핑의 당적을 유지시켰다. 주석의 뜻에 위배된다”며 반대했다. 발끈한 장칭과 한바탕 언쟁을 벌였다. 몇 시간 전의 화궈펑이 아니었다. 마오가 세상을 떠난 마당에 화궈펑의 주장엔 권위가 있었다.

날이 밝자 중공 중앙과 전인대(全人代), 국무원, 중앙군사위원회 명의로 마오쩌둥의 사망을 발표했다. 연금 중이던 덩샤오핑은 방 안에 마오의 사진을 걸어 놓고 작은 제단(祭壇)을 차렸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심장이 멎었다”며 온종일 식음을 전폐했다.

마오쩌둥 사망 다음 날, 당 부주석 왕훙원(王洪文·왕홍문)은 중난하이(中南海) 자광각(紫光閣)에 중앙판공청 직반실(中央辦公廳直班室) 간판을 내걸었다. 중앙판공청 명의로 전국의 성과 시·자치구에 통보했다. “주석 장례기간 중 발생하는 모든 문제를 직반실로 보고해라.” 직반실 업무는 왕훙원의 비서가 총괄했다.

후난(湖南)성 서기가 화궈펑에게 전화로 일렀다. 화궈펑은 예젠잉과 의논했다. 4인방을 제외한 정치국원들의 동의를 얻어냈다. 전국의 당·정 기관에 공문을 발송했다. “중앙의 동의를 거치지 않고 개설한 중앙판공청 직반실을 즉각 폐쇄한다. 중공 중앙 명의로 전국의 당·정·군에 통보한다. 모든 중대 문제를 화궈펑 동지를 정점으로 하는 당 중앙에 보고하고 지시를 받아라.” 마오쩌둥 사후 지휘계통을 장악하려던 4인방의 기도는 하루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국민은 묘한 속성이 있다. 친근한 지도자에겐 금방 싫증을 낸다. 독재자라고 비난은 해도 강한 지도자를 선호한다. 강력한 지도자가 등장하려면 천하대란은 시간 문제였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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