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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적치하의 3개월(25)|종교 수난(5)「6·25 20주년 3천 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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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북괴는 타종교에 비해 교세가 비교적 강하여 각계에 광범하게 뿌리를 박고있는 기독교에 대해서 처음에는 탄압을 하지 않고 제한만을 가하면서 백방으로 이용하려고 했다.
그 유례로 평양으로부터 2명의 붉은 지도급 종교인이 서울에 와서 집회를 열고 신앙의 자유와 교인들의 신분을 보장하겠으니, 기독교도들은 노력동원과 군비증강을 위한 헌금에 적극 참여해 달라고 감언이설로 꾀었다.
또한 일부 기독교도들을 충동하여 소위 궐기 대회를 두 번 열고 북괴집단 지지와 미국비난의 결의를 강요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북괴에 협조는커녕 저항을 시드하자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무자비한 탄압과 학살로 대했다. 그들이 후퇴할 때에는 목사라면 불문곡직하고 총살한 경우도 많았다.
다음은 적 치하에서 기독교인들이 겪은 수난의 기록이다.

<종교인들 교회사수 결의>
▲박설봉씨(당시 감리교총리 원 이사·현 상동교회목사·52)는『6·25가 난 다음날인 27일에 감리교 교직자들은 인사동의 중앙교회에 모여 서울에 눌러앉아 교회를 사수하고, 배에서 내려오는 피난민들을 수용, 구호하자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헤어 졌습니다.
거리로 나오니까「국군이 의정부 쪽에서 반격북진하고 있다」는 방송이 들려 마음 든든했지요. 그런데 28일 새벽 5시쯤 되니까 그때 우리 집이 마포였는데 형무소 쪽에서 난데없이 북괴집단 만세소리가 들리며 야단들 이예요. 새벽에 한강에서 요란한 폭음이 들려 파출소에 가 물어봤더니 괜찮다고 했는데…. 어 하튼 형무소소동을 보고 비로소 서울이 붉은 수중에 들어간 것을 알았죠.
아침 도보로 인사동 중앙교회까지 가보니까 아무도 없어요. 그 길로 만리 동에 있는 교인 네 집으로 가 피신했습니다. 교직자들끼리 서로 연락은 취했지요.
며칠 있으니까 서울시 인민 위에서 감리교 교직자들은 모두 냉 천 동의 서대문교회로 모이라는 지시가 왔지만 나는 안나갔옵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까 서대문교회 모임에는 북괴기독교 연맹위원장 김창준이란 자가 나왔대요. 이 자는 8·15해방 전까지는 감리교 신학교교수로 있다가 붉은 물이 들어 월북했던 자입니다. 김창준은 이 집회에서 북괴 헌법에는 신앙의 자유가 보장돼 있으며 남한의 종교정책을 자기가 책임지고 잘 수행하겠으니 세력동원과 무력증감을 위한 헌금운동에 직접 협조해 달라고 말했다 더 군 요.

<간계에 넘어가 일부는 자수>
7월 중순에는 북괴 문교 상 이만규가 내려와서 김창준과 함께 중앙교회에 교직자 신도들을 모아 놓고 장장 4시간의 강연을 했고요. 이만규는 한때 서울 모 여-중 교장과 우리 감리교 장로로 지내다가 월북한 자입니다. 또 이 무렵에 교직자들에게 모든 신분보장과 신앙의 자유를 준다면서 과거의 잘 못을 씻고 북괴에 충성을 맹세하는 소위 자수선풍이 불기 시작했어요. 이 바람에 일부교직자들이 그들 간계에 넘어가 자수를 했고 어떤 분은 나에게도 자꾸 자수를 권합디다.
8월17일 아침에 책을 좀 가지러 집에 들렀더니 2명의 수상한 자가 나를 보더니 같이 가자는 거예요. 대기해 놓은「세단」을 타고 끌어간 곳이 북아현동에 있는 서대문내무서예요. 입구에서 감리교본부총무인 박만춘 목사의 부인과 딸을 만났어요. 이분들에게 내 소식을 집에 전해달라고 부탁하고 들어가는데 박 목사가 끌려나오더군요. 옆에 있는 검은「세단」에는 김유순 감독이 벌써 취조를 받고 끌려나와 타고 있고요. 우리는 서로 목례로 슬금슬금 인생을 나누었는데 이것이 우리들의 마지막 이별이었습니다. 그분들의 생사는 그후 모르니까요.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날 하오2시까지 기독교 교직자들을 전원 체포하라는 지시가 내렸다는 거예요.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 자가 심문을 시작하는데 첫 서두는「왜 자수 서를 쓰지 않았느냐」 고 따져요.「쓸 필요가 없어 안 썼다」하니까 이승만 정권에 충성한 게 분명하다면서 뺨을 후려칩디다. 그래서 나는「북한에서도 신앙의 자유가 보장돼 있느냐」고 물었더니「그렇다」는 거 에요.「그렇다면 나는 목사로서 신앙생활을 한 것뿐인데 무슨 자수 서를 쓸 필요가 있소」라고 말하니까, 그자는 말문이 막혀 마구 발길질을 하며 때리데요. 나는「신앙생활 한 짓이 잘 못이라면 오늘이라도 총살을 해라」고 대들며 악을 썼습니다.

<6·25전에 교인동향을 파악>
그러자 그자는 이번에는 말머리를 돌려「49년 미군철수 때 신도궐기대회에 참석 안 했느냐」고 물어요.「안 했다」니까 책장 서랍을 열고 무슨 서류뭉치를 뒤적거리더니「정말 안나갔다」해요. 나는 49년의 궐기대회 때 미군철수 반대와 우 리에 무기를 달라는 등의 결의를 할 때 반대발언을 하다가 도중에서 퇴장하고만 적이 있어요. 그래서 나를 공산당이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지요. 그때 이북서 월남한 목사들은 우리도 총칼을 들고 싸워야한다고 주장했지만 나는 목사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반대했던 거죠.
우리는 신앙의 자유를 지키고 평화를 사랑하면 된다고 주장하다가 안 먹혀들어 퇴장했던 거죠. 이런 사실은 그때 감리교신학교학생 속에 잠입한 공산「푸락치」들이 일일이 그네들에게 보고해서 알고있었던 모양 이예요.
7월15일에는 서울시내의 일부 교직자들이 모여 궐기대회 같은 것을 두어 번 열었습니다. 노력동원에도 나갔고요. 그리고 뭐 기독교 연맹인가도 조직해 놓고 몇 사람이나가 일을 보았지요.

<"주소록 가져오겠다"도망>
이야기를 다시 내가 심문 받을 때로 돌아가서 그자가 교인들 주소를 대라고 으르렁대요. 그들은 이날 하오 2시에 모든 교직자들을 체포할 계획이었으나 뜻대로 안되니까 몹시 초조한 빛이 예요.
나는 살 기회는 이때뿐이라고 생각하고 그자에게 집에 둔 교인주소록을 가져오겠다고 수작을 걸었지요. 나는 학교 때 육상선수여서 여기만 나가면 뛸 생각이었어요. 그자는 신기하게도 내 말을 믿고 30분 안에 갔다오라고 해요. 그 길로 줄달음을 쳐 중앙교회로 가 김희운 목사를 찾았으나 벌써 붙들려 갔어요. 다시 도 동에 있는 교인 집을 찾아가 광속에 숨었습니다. 여기서 나는 몇 번 자살할까하는 생각이 들었고 붙잡히면 죽으려고 극약까지 준비했어요. 이때에 주인집 딸인 여학생이 내가 숨어 있는 광속에다 매일 나팔꽃을 몇 송이 갖다 꽂아 놓더군요. 나팔꽃이 햇빛을 향하는 것을 보고 나도 그 광명의 빛을 따르면 살리라 생각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서울수복으로 다시 햇빛을 보았지만, 우리 감리교 간부 중 김유순 감독, 박만춘 총무, 김희운 협동총무와 이사였던 김진규 방 훈 조상문 전효배 서태원 제씨가 납북됐습니다.』
다음은 지방에서의 기독교탄압에 관한 발언.
▲윤남하씨(당시 전북 오수교회목사·현 서울 행당동 새침 교회 목사·58)는『괴뢰군이 들어와서 도시의 목사들을 처음에 이용하려고 감시하면서 회유했지만, 시골목사들은 대부분 즉결로 총살했습니다. 전북에서는 김병환 김병엽 김성원 백남용 김종섭 이재규 목사 등이 전남선 배영석 김나호 원창권 김예진 박석현 이선용 김주현 손양원 목사가 괴뢰군에 의해 총살당했지요.
전북 옥구군 미면 해 성 교회서는 49명의 신도를 모아놓고 집단학살을 했습니다. 이 교회의 신자는 모두 53명이었는데 그중 4명만이 출타해서 살아났습니다.

<참살 비명 농악 울려 못 듣게>
나는 8월10일에 붙잡혀 전주형무소에 죽 수감돼 있는데 추석 전날 밤에 10시가 돼도 저녁밥을 안 주어요. 밥이라야 한 덩어리의 주먹보리밥이지만…. 밤 12시에 겨우 밥을 주어 먹고 자는데 새벽 2시에 괴뢰군들이 명단을 가지고 이름을 부르더군요. 이때는 대개 전직경관이 불려나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날 밤 2백여 명을 농업학교 교정에서 학살했습니다.
다시 27일 하오 2시쯤에 전에 보도연맹에 들었던 사람들을 나오라고 해요. 이들은 기쁜 표정으로 뛰어나가더군요. 5시에는 모든 수감자들을 나오라고 해서 약 3백 명이 앞마당에 모이니까 그자들은「우리가 남반부를 해방시키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50만의 미군이 진격해오므로 할 수 없이 후퇴하지만, 동무들은 이제부터 나가서 후방민심을 교란하고 인민군에 정보도 제공하라」고 합디다. 풀어준다니까 모두 기뻐서 만세를 부르며 옥문을 나오다 보니까 괴뢰군과 내무서원들이 황망히 도망치는 게 눈에 띄더군요.
그러나 이날 밤 (9월27일)에 참변이 일어났죠. 후퇴하던 괴뢰군 패잔병들이 다시 전주시내로 들어와서 석방한 수감자들을 다시 잡아 들였어요. 그리고 시내 좌익분자 가족을 총 동원해서 형무소 뒤뜰벽돌 공장에 길게 호를 파놓고 수감자들을 모두 15명씩 묶어다가 호 앞에 앉혀 놓고는 좌익분자들이 망치와 꼭 괭이 등으로 때려 죽였습니다. 밤새도록 농업을 울려 수감자들의 죽어 가는 비명소리를 못 듣게 하면서 이런 식으로 이날 밤에 약 1천 명을 학살했지요.
나는 처음 풀려 나오는 대로 평소 아는 민가에 있었기에 무사했지, 그 길로 집에 갔더라면 꼼짝없이 당했을 겁니다.
이때에 수감됐던 수명의 목사들도 학살당했지요. 9월28일 정오에야 유엔군이 들어왔는데, 하루만 일찍 왔더라도 이 참사는 막을 수 있었지요. 이때 학살된 시체는 대부분 나중에 가족들이 찾아갔지만 주인 없는 2백여 구는 형무소 건너편 언덕에다 묻고 합동 장례를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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