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동란 때 이대통령 축출 기도|전 미 대사관원이 밝힌 6·25 한-미 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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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동경동화】6·25 동난 직후의 한-미 정부간의 비 사가 내년 미국에서 출판된다. 필자는 6·25발발 당시 강한 미국 대사관 1등 서기관이었던「해럴드·J·노블」씨. 노블씨는 1951년 미국으로 돌아간 뒤 1952년에『동란 중의 대사관』(Embassy At War)을 집필 6·25 동란 발발부터 9·28 수복까지의 이승만 대통령·부초대사·드럼 라이트 참사관 등을 중심으로 한 당시의 사정을 월 고지 5백75장에 기록했으나 이듬해(1953년) 노블 씨의 사망으로 햇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는데 컬럼비아 대학의 볼드윈 교수(한국 정당사 전공·주 논문「삼일운동」으로 박사학위)에 의하여 내년에 발간된다.
이것은 볼드윈 교수가 지난주 서울에서 열린 한 미 기독교인의 한국 안보 세미나에 참석하고 돌아가는 길에 6일 동경 한국 연구원(원장 최서면씨)에 들러 밝혔는데 원고 내용은 당시 아직도 한국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미국 정책에 대해서는 상세히 쓰지 않았으나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과 함께 미국은 통일에 대비하여 이 박사를 권좌에서 축출할 계획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한다.
노블씨는『주한 국 대사관은 동란 발발 1주일 뒤부터는 영향력을 거의 상실, 맥아더 사령부, 미국무성 등의 연락기관 구실밖엔 하지 못했다』고 말하고 그러나 6·26부터 1주일간은 『한국정부를 유지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회고하면서 6·25가 터지자 이박사가 무초 대사를 불러『도망가자』고 말한 데 대하여 무초 대사가 만류했는데도 다음날 기차로 서울을 출발했다고 비난조로 말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 대사관은 남아있는 한국 정부 각료들로 정부를 유지하는데 최대의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노블씨의 회고는 맥아더 장군이 미국 국회에서『전쟁이 터지자 마자 한국군은 붕괴되고 말았다』고 증언한 것과는 달리『한국군은 잘 싸웠다. 그러나 정부는 그렇지 못했다』고 한국군의 용전을 말하고 있다.
또한 노블씨는 예기치 않은 불시의 기습으로 이 박사와 정부는 극도의 혼란과 공황에 빠졌으며 전쟁의 발발은 주한 미국 대사관의 정보 서기관으로『북괴 의도를 분석해야 했던 자기도 모르고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최근 미국의 일부 학자들간에서「6.25는 한국과 미국이 도발한 것」이라는 논고를 뒤엎는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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