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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종교수난(1)|적치하의 3개월|「6·25」20주…3천 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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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무신론을 표방하는 공산주의와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종교가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이야기다.「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칼·마르크」가 말한바와 같이 북괴는 처음부터 종교를 탄압, 말살하려는 정책을 취했다. 사문에 불과하지만, 북괴도 헌법 제14조에는 허울좋게「공민은 신앙 및 종교의식 거행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해 놓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에 불과하며 그들 속셈은 「왜 우리는 종교에 반대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의 북괴노동당 문헌에 잘 드러나 있다.
여기서 그들은「종교는 과학과 발전의 적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남아있는 비과학적 종교 및 미신의 잔재를 결연히 말살해야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①1946년 토지개혁 때 종교재산의 몰수 ②전후 파괴된 종교시설 복구금지 ③종교예식을 반혁명연동으로 규정하고 일체 이룰 금지하는 3단계 조치를 거쳐 종교를 말살했다. 이와 함께 대대적인 반종교 운동을 전개하여 신도들을 공개 리에 살해했는데 그 일례로 1960년 8월17일에 8명의 기독교인을 해 주시 공설운동장에서 공개 총살에 처했다.
북괴가 남한을 점령한동안 각 종교에 가한 탄압과 박해는 북한에서의 축소판 그대로였다. 점령기간이 짧았던 관계로 북한에서 보다 오히려 더 박해의 속도가 빠르고 혹독했다. 다음은 수동은 능동보다 더 영광스럽고, 사랑은 미움보다 더 생산적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준 각 종교인들 수난의 기록이다.
그럼 먼저 한 전문가로부터 북괴의 전반적인 종교정책부터 들어보기로 하겠다.

<처음엔 옥내집회는 허용>
▲최광석씨(당시 서울 모대 교수·납북·김일성 대학 철학교수·63년 남파귀순·현 모 방송국 전문위원·50)『북에서 유물사관과 종교문제 등을 10여 년간 연구 강의했어요. 간단히 결론지어서 유물사관에 입각한 공산주의와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종교와는 합치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이 종교를 말살하려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인데 그 과정에는 3단계가 있어요. 제한·탄압·이용의 3단계가 바로 그것입니다. 북에서는 6·25때까지 제한정책을 실시했고, 51년부터 철저한 탄압을 했으며, 60년대에 들어서 부터는 이용정책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 갈아요. 북한에서 6·25때까지 5년간 실시한「제한정책」은 대상 종교가 기독교냐 불교냐 또는 천도교냐에 따라 그 강도가 달랐고, 연차적으로 더 심하게 죄어나갔지요. 이를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처음에 종교는 교회·성당·사원 등 옥내에서만 집회와 의식을 허용했어요. 그러다가 46년 후반기「임시 북조선인민위원회」시절에는 종교의 자유와 더불어 반대의 자유를 내세우고 주로 천주교와 기독교에 대해 옥내집회와 의식도 못하게 하는 방향으로 나갔지요.
그 방법은「시끄럽게 군다」는 등 이유로 이웃주민들의 의사를 가장해「교회를 옮겨라」「찬송가 소리가 크다」고 압력을 넣었지요. 그리고 당원을 시켜 교회 안에서 공연히 행패를 부리게 하기도 하구요. 이렇게 하니까 교회가 자연히 줄어들고 교세도 시들어졌어요.
한편 이 단계에서 절(사) 은 그냥 두되 스님들의 인원수를 제한하고 그 사람에게만 식량배급을 주었어요. 수백 명 스님이 있던 석왕 사는 50명으로, 기타의 작은 절은 규모에 따라 5명 이하로 줄였지요. 시주와 탁발은 전적으로 금지 하구요.

<사원 땅 몰수 "승려도 일하라">
그리고 사원소유토지는 모두 몰수했습니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천도교에 대해서는 덜 심하게 대한 것 같아요. 부농 층에 광범한 세력을 갖고있던 천도교마저 박해를 가해 반발을 사면, 공산당의 밑바탕 구축에 지장을 받기 때문이겠죠. 또 천도교도들로 구성된 청우 당의 압력도 있었던 것 같아요.
47년 2월에 임시자가 떨어진「북조선 인민 위」가 수립되고서는 제한정책을 강화, 탄압의 기본작업이 시작되어 교회와 성당에 대한 실태조사와 정비작업을 서둘렀습니다.
교회에 대해 그 크기에 따라 교인이 일정한 수에 미달이면 교회를 폐쇄한다고 선언하고 교인들 명부를 작성했어요. 교회에서는 때로는 허위 교인명부도 제출했지만, 그들은 일일이 확인했어요. 이때 천주교세가 강한 선천 군에선 10여 개의 교회와 성당이, 그리고 용천 군에서는 6개의 교회가 문을 닫았습니다. 절에 대해서는 승려들도 일하고 먹어야 한다면서 노동의무를 부과 했구요.
1948년 9월9일에 북괴집단이 수립되자「공산제도하에서 종교활동을 공공연하게 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고 했어요. 이것은 노동당대회 문헌과 문화선전 성 조례에 명시돼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신앙생활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당은 직접적으로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알쏭달쏭한 말을 하기도 했죠.

<금강산 묘향산 절은 중수>
여하튼 이 단계에서는 종교를 반대할 자유도 있다는 묘한 구실을 내세워「대중운동」에 의해 종교를 일소하려고 했지요. 이때쯤 신학교는 모두 문을 닫았습니다. 하급학교 학생들이 진학할 때 교육성에서 신학교에는 학생을 배당해 주지 않으니까 문을 닫을 수 밖 에요. 또한 이때쯤 중들도 절을 버리고 도망치거나 환속하는 사람이 많아 절도 많이 비었지요. 이런 절은 가까운 이-동에서 관리위원회를 만들어 관리했지요. 우스운 것은 금강산과 묘향산의 큰절과 유명사찰은 오히려 중수를 했어요. 그것은 문화재로서 보존가치가 있기 때문이지 결코 신앙과 의식을 위해서가 아니 예요.
이 단계에서 교회·성당 등은 십자가나 성상 등 구조는 그냥 두고 회의 장소·강습소·유치원·탁아소등 다른 목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목사·신부에 대해서는 그들의 설교활동이 공산정권에 이롭지 못한「반동행위」라고 처단 하구요.
그래서 이 무렵에 교직자들이 대거 38선 이남으로 넘어왔습니다. 교인은 정치불신자로 규정, 출신성분이 나쁘다고 일체 요직은 주지 않았지요. 그래도 이 단계에서 천도교인에게는 더러 실권 없는 명예직정도는 주었어요.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북괴집단이 범국민적이라는 것을 내세우기 위한 그들 술책에서였지요.

<어용종교인 만들어 이용>
이때부터 그들이 만든 관제기독교연맹·불교도연맹·천주교 중앙 회 등에 어용종교인들이 끼어 설쳤고,「하느님의 뜻을 따르더라도 현 정치제도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등 괴리들이 생겨나기도 했어요. 6·25전까지 이런 제한정책 아래에서도 탄압과 이용정책이 엇갈리기도 했어요.
불교보다 천주교와 기독교가 더 심한 제한정책을 당했어요. 절은 산에 있고 집회가 개인적인데다가 오랜 동양의 밑바탕사상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에 제한도가 덜했고, 교회나 성당은 주로 도시 안에 있어 집회가 대중적이며, 서양전래의 것이어서 제한이 더 심했습니다.
제2단계의 탄압정책은 6·25를 기해서 강행됐는데 전쟁 때문에 더 가속됐어요. 종교인들이 공산정권에 가장 세찬 반대운동을 했고 국군의 북진당시 제일 환영, 협조했기 때문이죠.

<국군 환영했던 종교인 학살>
그들이 압록강까지 쫓겨갔다가 내러와서는 교직자이건 교도이건 간에 철저히 조사해서 체포·투옥·학살을 했어요. 이미 교직자의 대부분은 그전에 숙청됐었지 만 요.
이때는 천도교인들이 교인의 비율에 따른 희생은 오히려 다른 교보다도 더 많았습니다. 평북 운산군 천도교인들은 국군환영위원회를 만들고 수천 장의 태극기를 만들기도 했는데 나중에 공산주의자들이 다시 들어와 많은 희생자를 냈습니다.
철저한 탄압단계로 들어가 이때에는 교회 등의 십자가·불상·마리아 상등을 모조리 철거하고, 시설내용도 뜯어고쳐 버렸어요.
북괴가 남침했을 때 종교에 대해 처음엔 북에서 실시한 제1단계의 제한정책을 썼습니다.
비밀지령으로「성직자를 체포·구금함으로써 활동을 못하게 하라, 교도들의 명부를 파악하라, 종교 재산을 압류하라」는 등을 지시하면서도, 전쟁중이라 인심을 얻으려고 교회 등에 형식상의 피해는 안주는 방향으로 나갔어요. 그들은 종교를 이용해 민심을 포섭하려고 교묘한 정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북의 정책을 남한서 반복>
즉 십자가가 있는 교회는 폭격을 않는다는 점을 이용해 교회에 사람을 모이게 하고 그 근처에 군사 물 비슷한 것을 일부러 노출시켜 폭격을 유도하는 등의 수법이지요. 이런 식으로 하여 교회가 폭격을 받아 모였던 교인들이 상당히 죽었어요. 그러면 그자들은「미국 놈들이 십자가도 무시하고 폭격하니 공산당밖에 믿을 사람이 없다」는 식의 역선전을 했지요. 어떻든 북괴의 종교말살 정책은 변함이 없는 것이고, 북한에서 단계적·연차적으로 실시된 정책을 남에서 그대로 강행할 심산이었죠.
끝으로 제3단계의 이용정책은 소련이나「헝가리」등에서 현재 실시중인데 이는 지하에 잠복한 종교인들을 지하에 두지 않고 양성화해 선도(?) 이용하자는 것입니다. 우선 적극적인 반대자로 만들지 말고 파악해 두었다가 유사시에 손쉽게 제거하자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보다 더 지능적이며 교활한 종교탄압의 수법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제2단계의 탄압정책에서 종교는 거의 말소되어 표면에는 존재하지 않으니까, 지하로 들어간 것을 3단계에서 노출시키자는 것이지요. 근래 소련 등에서는「공산주의와 종교는 합치한다」고 터무니없는 밀들을 떠들면서「여호와」하나님의 개념을 변질시키려고 기도하고 있어요. 60년 중반기부터 북괴도 종교에 대해 제3단계의 이용정책으로 들어가고 있는 조짐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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