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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강 야당, '준법투쟁' 만으로 충분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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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정하
정치국제부문 차장

민주당이 장외투쟁 54일 만에 국회로 돌아왔다. 김한길 대표는 ‘24시간 국회 비상 운영’이니 ‘침낭 투쟁’이니 하면서 거창한 표현을 동원했지만 결국은 국회 문을 다시 열겠다는 얘기에 양념을 친 것에 불과하다. 54일의 장외투쟁은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 시절 세웠던 53일(2005년 12월~2006년 1월)의 기록을 넘어선 것이다. 장외투쟁 신기록을 수립하기까지 민주당 의원들이 서울시청 앞에서 풍찬노숙을 하면서 얼마나 고생했을지는 짐작이 간다. 하지만 냉정히 따져보면 도대체 민주당이 장외투쟁을 통해 얻은 게 뭔지는 아리송하다.

 장외투쟁 기간 중에 민주당 지지율이 크게 오르지도 않고 국정원 댓글 사건에 대해 박 대통령의 사과를 받아내지도 못했다. 민주당이 추진하는 정책·법안 처리를 보장받은 것도 없고 심지어 당 지도부의 리더십이 더욱 공고해졌다고 보기도 어렵다. 모든 게 장외투쟁을 시작했던 8월 1일의 시점에서 진전된 게 없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으론 장외투쟁이란 게 시대착오적 전술이기 때문이다. 원래 장외투쟁은 여당이 의석수를 앞세워 야당을 깔아뭉개고 쟁점법안을 일방적으로 통과시켰을 때 야당이 들고나오는 독수(毒手)다. “국회는 여당의 횡포 때문에 포기할 테니 우리는 국민을 상대로 거리의 정치를 하겠다”는 약자의 항쟁이다. 우리 국민들은 명분이야 어떻든 강자가 힘자랑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그래서 장외투쟁은 동정론 유발→여권의 정치적 부담 확대→야당에 대한 정치적 양보→국회 정상화의 수순을 거치는 게 기존 정치의 정석이었다.

 하지만 19대 국회부턴 사정이 달라졌다. 새누리당은 다수당이긴 해도 국회선진화법에 발이 묶여 민주당 협조 없이 어떤 법안도 통과시킬 수가 없다. 국회의장 직권상정이 사실상 불가능해져 야당이 등원을 거부하면 국회가 올스톱된다. 이제 장외투쟁은 수동적인 저항이 아니라 능동적인 공격의 의미를 갖게 됐다. 마치 현대차 노조가 사측을 압박하기 위해 생산라인을 세우듯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현 민주당은 ‘2002년 한나라당’과 맞먹는 역대 최강급의 야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회에서 모든 걸 블로킹할 수 있는 야당이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장외로 나간 건지 상당수 국민들은 납득을 하지 못하고 있다. 장외투쟁이 동정론으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다.

 민주당 지도부도 이런 현실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매번 몸통(당)이 꼬리(촛불시위 주도 그룹)에 끌려가는 관성을 이번에도 극복하지 못한 채 엉거주춤 떼밀리듯 거리로 나섰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김 대표는 뒤늦게 “국회에 가서 의정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강력한 원내투쟁을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진작부터 그랬어야 한다. 국회에서 정책으로 승부하는 게 정당정치의 본령이다. 막강해진 야당은 ‘준법투쟁’만으로도 얼마든지 여당을 질식시킬 수 있다. 장외투쟁의 시대는 이제 막을 내려야 한다.

김정하 정치국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