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누른 양적완화 축소 버튼 … 올해 안에는 힘들 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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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월가의 예측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 18일 양적완화(QE) 축소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월가의 4단계 시나리오가 깨졌다. ‘9월 QE 축소 시작→내년 3월 QE 완전 중단→2015년 중반 기준금리 인상→2015년 말 자산 매각’이라는 수순의 첫 단추마저 못 끼웠다.

기회 3차례 남았지만 사실상 물건너가

  버냉키는 올 5월 “고용시장 사정이 좋아지고 있다는 확신이 들면 두서너 번 공개시장정책회의(FOMC)를 거친 뒤 자산매입을 줄여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시장에 언질을 준 셈이었다. 순간 월가의 경제분석가들이 QE 축소 시나리오 짜기에 나섰다. 그들은 9월에 버냉키가 행동에 나설 것이란 전망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른바 ‘9월 축소설’이다. 여기에 몇몇 FOMC 멤버들도 9월 축소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9월 FOMC 회의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버냉키는 QE 축소를 시작하기는커녕 경기 전망마저 낮췄다. 올 성장률을 기존 예측보다 0.3%포인트 떨어진 2.0~2.3%로 낮춘 것이다. 버냉키가 18일 성명서에서 “금리 상승과 연방정부의 긴축재정(시퀘스터)이 경제 성장을 제약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금리 상승은 버냉키의 자업자득이다. 그가 5월 QE 축소를 입 밖에 낸 이후 미 10년 만기 국채 금리가 1.6% 선에서 2.9%대까지 올랐다. 그 바람에 미국 주택담보대출 금리도 올랐다. 주택시장과 소비심리가 흔들리는 조짐을 보였다.

 고용시장마저 불안한 모습을 나타냈다. 8월 실업률이 7.3%로 버락 오바마 대통령 집권(2009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지만 내용이 좋지 않았다. 미 노동부는 “새 일자리가 많이 생겨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 찾기를 포기해 실업률이 낮아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8월 현재 미국의 구직 단념자는 9050만 명에 이른다. 전체 인구 가운데 노동시장에 참여하는 비율이 8월에 63.2%로 떨어졌다. 1978년 8월 이후 35년 만에 최저다.

 그러면 버냉키는 언제 QE 축소에 나설까. 버냉키가 주재할 FOMC 회의는 세 번밖에 안남았다. 올 10월·12월, 그리고 내년 1월 회의다. 이후엔 이변이 없는 한 FRB 의장에서 물러난다. 로이터 통신은 “버냉키 영향력이 그나마 유지된 회의가 바로 9월 FOMC였다. 하지만 그가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고 했다.

 제임스 블라드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연은) 총재는 20일 “연방준비제도(연준)가 다음달에 경제지표를 보고 양적완화를 축소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FOMC에서 의결권을 갖고 있다. 흘려들을 수 없다. 하지만 그가 말한 대로 한 달 사이에 실물 경제 지표가 좋아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

 더욱이 10월부턴 차기 FRB 의장 지명전이 본격화한다. 버냉키가 레임덕(권력 누수)에 시달릴 수 있다. 또 요즘 버냉키는 100년 FRB 역사상 정치바람이 가장 거센 시기 중 하나에 직면해 있다.

시장과 소통 실패로 국채금리 올려놔

 미 금융 전문가들이 말하는 ‘금융통화정책 전환기’다. 100년 FRB 역사에서 서너 차례 있었다. FRB가 설립된 1913년 전후, 30년대 대공황 시기, 70년대 말~80년대 초 스태그플레이션 시기 등이다. 미 통화정책 역사가인 로버트 헤첼 FRB 이코노미스트는 “그 시기엔 통화정책 시계추가 성장에서 일자리 창출 쪽으로 또는 반대로 빠르게 움직였다”고 설명했다. 스티븐 로치 예일대 교수는 최근 글에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FRB 통화정책이 기존 통화가치 안정 쪽에서 성장(일자리 창출) 쪽으로 바뀌고 있는 듯하다”며 “그 전환을 놓고 논쟁과 갈등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 첨예한 갈등이 차기 FRB 의장 경쟁에서 선두주자인 래리 서머스 전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이 낙마한 가장 큰 이유다. 그는 민주당 좌파들의 반발 때문에 의장 꿈을 접었다. 민주당 좌파는 “월가로 넘어간 통화정책 주도권을 일반 시민들 쪽으로 돌려놓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이다.

 그들이 지지하는 후보는 재닛 옐런 현 FRB 부의장이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도 21일 옐런 지지를 공식 선언했다. “백악관도 민주당 상원의원들에게 전화를 걸어 옐런이 (반대 세력들의 공격 때문에)상처받지 않도록 보호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블룸버그 통신이 이날 전했다.

 하지만 서머스를 반대하는 세력만큼이나 옐런을 거부하는 쪽도 만만치 않다. 상원 인준에 중요한 역할을 할 공화당이 그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투자의 귀재’인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은 21일 “버냉키가 의장을 한 번 더 해야 한다”며 “차선은 없다”고 말했다. 버냉키가 FRB 의장에 세 번째로 지명받을 가능성도 엿보이는 대목이다. 문제는 그의 의지다. 그는 이미 “더 이상 연임을 추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런 뜻으로 올 8월 세계 중앙은행 총재들의 연찬회(잭슨홀 미팅)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차기 의장 불투명 … 정치에 휘둘릴 가능성

 여성인 옐런은 강력한 QE 지지자다. 중앙은행이 돈의 가치를 어느 정도 희생하더라도 일자리 창출에 힘을 쏟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는 앞으로 반대세력이 옐런을 문제삼을 때 걸고 넘어갈 대목이다. 그만큼 QE를 둘러싼 논쟁이 거세지기 십상이다.

 로이터 통신은 “앞으로 QE 축소 논란은 FRB 건물 안보다는 밖(정치권 등)에서 더 커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버냉키가 올해 안에 경제 변수만을 보고 QE 축소를 단행하기가 쉽지 않아 보이는 이유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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