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드골」장례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파리12일 로이터 동화】전「프랑스」대통령「샤를·드골」장군은 12일 전「프랑스」 국민과 세계 지도자들의 애도 속에서 향리「콜롱베·레·되제글리주」의 유택에 조용히 묻힌다.
향리「라브아세리」장거 실에 안치 되어있는 장군의 유해는 이날 길이 2m10㎝의 참나무 관에 입관되어「프랑스」군 장갑차에 실려 마을 교회로 옮겨지며 마을청년 6명이 관을 운구하여 묘소에 놓여진 뒤 3군 의장대 1백20명이 참석한 가운데 하오 3시(한국시간 12일 하오11시)1시간동안 간소한 장례식이 거행된다.
장군의 유해는 1948년 스무 살의 나이로 폐결핵으로 죽은 딸「안」의 무덤 곁에 묻히는데 묘비명은 파란 많았던 그의 생애와는 달리『「샤를·드골」(1890∼1970) 』이란 간략한 것이 된다. 한편 향리의 장례식에 앞서 이날「파리」「느트르담」사원에서는 상오 11시(한국시간 하오 7시)부터 세계80여 개국 지도자들과 「퐁피두」대통령을 비롯한「프랑스」지도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추도 미사가 열리며 추도식이 끝난 뒤 일부 지도자들은「콜롱베·레·되제글리즈」를 방문하여 장군 묘를 참배할 것으로 알려졌다.

<군주처럼 군림했으나 미련 없이 두 번 물러난 민주주의자|nyt, 드골 찬양>
【뉴요크 11일 AFP 합동】「뉴요크·타임스」지는 11일 사설 난에 「드골」전「프랑스」대통령은『하나의 전설이었으며 그의 이름은 바로 예언이었다』는 정문의 찬사를 실었다. 그 요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드골」의 이름은 하나의 예언이자 전세이다. 그의 생애는 자기가 「프랑스」를 구하도록 태어났다는 신비스런 사명감 위에서 이룩되었다.
그는「프랑스」의 어느 왕 심지어 「루이」14세 보다도 더 위엄이 있었으며「프랑스」 국민과 그 동맹국이 그처럼 다루기 힘든 지도자가 「프랑스」엔 일찌기 없었다.
그는「처칠」이『내가 짊어진 가장 무거운 십자가는 「로렌」의 십자가(프랑스를 상징)였다』고 말 할만큼 고집불통이었다. 「드골」은 대외 정책에서보다도 대내 정책에서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역사가들은 기록할 것이다. 그는「프랑스」에 정치적 안정과 훌륭한대통령 중심 제를 유산으로 남겼는데 이것은 가장 오래 남을 그의 기념비가 될 것이다 .「드골」은 군주처럼 군림했으나 한편으로 민주주의자답게 권좌에서 두 번이나 미련 없이 물러나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는 근엄하고 고집 세고 용감한 인간으로서 마지막까지 인간의 권위를 지키면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