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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아파트를 떠나면 얻게 되는 것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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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다니엘 튜더
전 이코노미스트
서울특파원

서울에 온 첫날 청담동에서 약속이 있었다. 청담역에 내리니 사방이 20층, 30층짜리 고층아파트 천지였다. 내 고국 영국에서 아파트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청담동도 그런 동네로 생각됐다. 알고 보니 서울 사람들은 모두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첫날 내가 봤던 성냥갑들이 하나에 10억, 20억원 하는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시골에 가서도 놀랐다. 아파트 건물이 회색의 덮개처럼 들판에 서 있었다. 서울은 그렇다고 쳐도 시골에서까지 다닥다닥 붙어 사는 건 미스터리였다. 한국의 시골은 아름다운 곳이지만 거대한 콘크리트 상자 때문에 경관을 망치는 경우가 많다.

 아파트에 무슨 마력이라도 있는 것일까.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대답은 항상 똑같다. 유지 관리가 쉽고 살기 편리하다는 것이다. 자기 집 창문도 닦을 필요가 없으며 대중교통 수단에 쉽게 접근할 수 있고 근처에 편의점이 있다는 식이다. 근무시간이 엄청나게 긴 이 나라에서 아파트는 하늘이 준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파트 생활은 한국의 부동산 붐과 궤를 같이했다. 붐이 있던 시절은 좋았다. 한 채 사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부자가 된다. 이런 시절의 기억은 떨치기 어렵다. 심지어 지금도 아파트를 사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일부 있다. 별난 사람들이다. 물론 건설회사는 여전히 아파트로 큰돈을 벌 수 있다. 한 가구당 건설비가 매우 싸지만 분양가는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매자 입장에서는 부자가 되는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 그리고 아파트의 시대는 지나간 것일지도 모른다.

 서울의 인구는 줄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애를 낳지 않으니까 교육열 때문에 값이 올랐던 강남 같은 지역은 타격이 클 터이다. 게다가 베이비 붐 세대가 은퇴하기 시작했다. 이 중 많은 사람은 원치 않는 은퇴를 한 사람들이다. 서울에 남아 있으면 생활비 부담으로 허덕일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서울의 아파트를 팔고 지방, 아마도 고향으로 이사 가는 것이 자연스러울 터이다. 일부는 내려가서 소규모 자영업을 시작할 수도 있다. 서울의 인구는 줄고 지방 인구는 느는 셈이다.

 사람들이 일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근무시간은 지금도 너무 길지만 점차 짧아지는 추세다. 대기업도 예전처럼 일자리를 많이 만들지 못하며 이런 현상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는 점을 누구나 알고 있다. 앞으로는 프리랜서들이 크게 늘어날 것이다. 독립적이고 창의적인 유형의 사람들을 비롯해 혼자서 일하는 사람들이 크게 증가할 것이다. 이들은 정규직과 같은 안정성은 없지만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할 수 있다는 장점은 누리고 있다. 심지어 앞으로는 아웃소싱 대신에 ‘지방 소싱’이 유행해 하나의 추세가 될지도 모른다. 기술의 발전은 이 모든 것을 점점 더 실현되기 쉽게 해줄 것이다.

 사람들은 도시를 벗어나 아파트가 아니라 개인 주택에서 사는 장점에 눈을 뜨게 될 것이다. 지금 시골의 아파트는 주변 환경을 완전히 망치고 있다. 과거 한옥에서 자란 사람은 외풍이 심하고 유지 관리가 어렵다는 기억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요즘 현대화된 한옥이나 개인 주택에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다. 내 친구 중에는 남양주에 2층 집을 지은 사람이 있다. 이 부부는 정원이 있는 멋진 집에 살지만 직장이 있는 서울로 가는 데 한 4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청담동 살면서 여의도로 출근하는 사람보다 불편하게 사는 것도 아니란 말이다.

 내 친구가 들인 돈은 서울의 비싼 아파트 가격의 몇 분의 일에 불과했다. 이들 부부가 낳은 아이는 맑은 공기를 마시며 자라날 것이다. 이런 맑은 공기는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중한 재화다. 이 아기는 또한 바깥에서 놀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집 마당에서 말이다. 가족 전체가 좀 더 여유 있고 느리게 사는 이점을 누리면서도 필요할 때면 언제든 도시로 들어갈 수 있다. 나는 일시적으로 아파트, 아니 오피스텔에 살고 있다. 눈을 뜨면 냉장고가 보인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는 전혀 모른다. 거기 있으면 지루하고 답답하다. 내가 언제 이사를 가게 될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만일 간다면 또 다른 성냥갑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다니엘튜더 전 이코노미스트 서울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