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훈의 청와대통신] 5년을 여는 25분 연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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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25일 국회 앞마당에서 선보일 노무현 당선자의 대통령 취임사는 역대 취임사 중 가장 짧은 취임사가 될 것 같다. A4용지 여덟장, 5천3백자 분량이어서 중간 박수를 감안해도 25분 안팎에 그칠 것 같다는 얘기다.

새 대통령의 취임사는 그의 국정철학과 새 정부의 정체성을 대내외에 밝히는 출발점이다. 대통령 취임사의 형식과 내용이 흥미있는 연구대상이 돼온 이유다.

공장 노동자 출신의 브라질 대통령 룰라는 지난 1월 취임식에서 "모든 국민이 하루 세끼 밥을 먹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압축된 말로 경제난에 허덕이던 국민의 박수를 얻어냈다. 취임사는 아니었지만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라는 명구로 역사에 남은 링컨 대통령의 게티즈버그 연설은 실제론 2백70개의 단어, 메모지 한장 반의 극히 짧은 연설이었다.

68세에 미국의 9대 대통령(1841년)에 당선된 윌리엄 헨리 해리슨은 꽃샘추위로 악명 높은 3월 4일 워싱턴에서 코트와 중절모를 착용하지 않고 1백5분간의 긴 취임사를 하다 폐렴에 걸려 한달 뒤 서거하고 말았다.

그간 우리의 대통령 취임사는 국정 총망라형이었다. 진한 기억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게 대체적 평가다. 많은 메시지를 전하려다 대부분은 5년 뒤 씁쓸한 빈말이 되고 말았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35분 안팎의 취임사에서 "다시는 무슨 지역정권이니 도 차별이니 하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앞의 대통령들은 "민족 진운의 새 봄이 열리고 있으며 경제의 활력을 되찾고 살리는 일이 개혁의 시발"(金泳三), "나를 포함한 지도층이 정직의 수범을 보여 도덕성있는 정부를 만들겠다"(盧泰愚)고 했다.

'개혁과 통합'이 주제인 이번 취임사의 얼개는 이렇다고 한다. 대구지하철 참사에 대한 애도가 긴급 첨가됐다. 6천만 동포(노태우), 7천만 동포(김영삼)에 이어 '8천만 동포'라는 표현을 썼다가 뺐다고 한다. '참여정부'에 북한동포와 참정권이 없었던 해외동포가 들어가게 되는 모순 때문이라지만 민감한 북핵 국면이 고려된 듯하다.

1백여년의 한국 역사를 되돌아보는 내용도 있다.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앉아있어 친일(親日) 문제는 '기회주의의 역사'라는 정도로 완곡하게 표현한다고 한다. 취임사의 마지막은 "우리가 모두 마음을 모읍시다. 우리는 마음을 모으면 기적을 이뤄내는 민족이 아닙니까"라는 말로 매듭짓는다.

盧당선자는 당선자 시절 '말씀자료' 1백67쪽에 이르는 많은 발언을 해왔다. 다변(多辯)으로 알려진 盧당선자가 '짧고 굵은 취임사'를 택했다니 다행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멋을 낸 추상적 표현은 '실용주의적 간결체'로 고치라고 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盧당선자가 '국민통합'을 마무리로 삼은 대목에 기대를 걸어본다.

익히 알려진 그의 '개혁 드라이브'만을 열거하기보다 그를 선택하지 않았던 절반의 사람들, 뭔가 불안해 하는 이들을 보듬어 가는 배려가 필요한 시점인 때문이다.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길 취임사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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