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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사립고교로 유학 갈 필요 없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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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일고 국제과 건물인 서밋홀 2층 교실에서 학생들이 외국인 수학 교사로부터 강의를 듣고 있다.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에서 학생들은 보통 8~9명이 참여해 외국인 교사와 토론을 한다.

천안 북일고는 비평준화 지역 충남의 명문고다. 2010년 자율형사립고로 전환했다. 학생 선발 범위를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국내 대학을 목표로 하는 일반계열 외에 한 학년 30명 정원의 국제과를 신설했다. 외국 명문 사립학교에 버금가는 교육을 시킨 후 해외 대학에 진학시키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렇게 입학한 국제과 남녀학생 25명이 지난 2월 처음 졸업했다. 이들은 전원 해외 대학에 진학했다. 지역 명문에 머물지 않고 글로벌 명문 학교로 발돋움하고 있는 북일고를 찾았다.

자사고 학비로 미 명문 사립학교 교육 받는 국제과

 지난달 9일 오후 2시 충남 천안시 동남구 북일고 교정. 본관을 지나 2층짜리 아담한 건물인 서밋홀(Summit Hall)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유창한 영어가 들려왔다. 서밋홀은 이 학교 국제과 학생들이 공부하는 곳이다. 1층 세미나실에선 학생 5명이 둘러앉아 두꺼운 영어 원서를 뒤적이며 토론하고 있었다. 물론 영어로. 맞은편 컴퓨터라운지에서 만난 한 학생은 영어 에세이를 쓰고 있었다. 또 다른 학생은 “미국 문학 수업 준비를 해야 한다”며 미국 현대 소설을 원서로 읽고 있었다.

2층 교실로 올라가자 둥근 원탁에 둘러앉은 학생 8~9명이 원어민 교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학교 풍경은 마치 미국 동부의 어느 사립학교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북일고는 원래 남학교인데, 국제과는 남여학생을 모집한다. 현재 국제과에는 남학생 43명, 여학생 35명이 재학중이다.

 북일고는 1976년 한화그룹 창업주인 고(故) 김종희 회장이 설립했다. 개교 이래 서울대(352명)·연세대(359명)·고려대(630명) 등 상위권 대학에 졸업생을 꾸준히 진학시키며 지역 명문 입지를 굳혔다. 한화의 지원에 힘입어 대학 캠퍼스 못지않은 33만578㎡(10만여 평)의 교정과 852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 고교 최고 수준의 전용야구장, 첨단 실험 장비를 갖춘 과학실험실 등 뛰어난 시설을 자랑한다.

 2010년 자율형사립고로 전환하면서 ‘제2의 개교’를 선언했다. 일반계열 외에 해외 명문대에 학생을 진학시키기 위한 국제과를 신설했다. 이 학교 국제과는 원어민 교사가 몇 명밖에 되지 않는 일부 학교의 국제반과는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국어와 국사, 음악·미술·체육을 제외한 전 과목을 외국인 교사가 담당한다. 이를 위해 외국인 교사 16명을 초빙했다. 박사학위 소지자 3명을 비롯해 석사학위 9명, 국제변호사 1명 등으로 예일·하버드·MIT 등 명문대 출신이 많다. 이 교사들이 미국 칼리지보드(미 대학입학 자격시험인 SAT를 주관하는 민간기관)가 승인한 AP(대학학점 선이수제) 교과 과정 20개를 가르치고 있다. 학교 관계자는 “외국인 교사에게 아파트 한 채씩 제공한 것을 제외하고도 이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연간 15억원”이라고 말했다. 몸값 비싼 수준 높은 교사가 수업을 이끌고 있다는 얘기다.

  국제과 교육과정을 만들 때부터 관여한 이영준(입학·진학 담당 부디렉터) 교사는 “학교 이사장인 한화 김승연 회장이 국내에서도 저렴한 비용으로 글로벌 수준의 교육을 제공하자는 아이디어를 낸 뒤 각국 명문고를 돌아다니며 벤치마킹을 했다”며 “때마침 교육과정을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자율고가 생겨나던 때여서 우리 학교만의 독특한 프로그램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소개했다.

  국제과를 시작하면서 북일고 측은 학생을 위한 여섯 가지 목표를 세웠다. 시험 영어가 아니라 실제 학습에 필요한 영어 능력, 토론 능력, 프레젠테이션 기법, 연구 노하우,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 다양하고 이질적인 문화에 대한 수용성 등을 키워주겠다는 목표다. 이 교사는 “국제과는 해외 대학으로 진출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인재를 길러내기 위한 프로그램”이라며 “외국 대학 진학 후 전 세계 학생들과의 경쟁에서 뒤지지 않게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사항을 교육 목표에 넣었다”고 설명했다.

 

외국인 교사들은 한두 개 과목을 맡아 지속적으로 토론을 시키며 프레젠테이션 과제와 연구 과제를 쏟아낸다. 이런 수행평가 비중이 70% 이상이다. 북일고 측은 국제과 학생들이 스스로 자기 관리를 하는 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데도 집중한다. 이 역시 해외 대학 진학 후 성과를 내기 위해 꼭 필요한 항목이기 때문이다. 이 교사는 “정규 수업이 끝나면 클럽 활동을 하든 과제를 하든 스스로 결정한다”며 “매일 3시간30분 분량의 과제가 나가기 때문에 시간관리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멘토 교사와 선배 멘토, 담임과 상담교사가 시간 관리법을 조언해준다.

 올 2월 첫 배출된 국제과 졸업생 25명 전원은 해외 대학에 진학했다. 예일·코넬·다트머스대 등 아이비리그와 스탠퍼드·듀크·노스웨스턴·UC버클리·뉴욕·존스홉킨대 등 미국 유수 대학에 복수 합격했다. 2011년 국제과 학생들의 AP시험 평균점수는 4.4점(5점 만점)으로, 외부 사교육 없이 학교에서 배운 것만으로 이런 결과를 냈다. 미국 대학수학능력시험인 SAT 평균 역시 읽기 750점, 수학 780점, 쓰기 730점(각 800점 만점)으로 높았다. 2학년 때 이 학교를 조기 졸업하고 미국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 2학년에 재학 중인 이민홍(19)군은 “미국 대학에 와보니 에세이 쓸 일이 굉장히 많다”며 “국제과에서 거의 매일 했던 일이라 큰 어려움이 없다”고 말했다. 의과 대학원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는 그는 “미국 대학은 ‘한국 학생은 무조건 외우는 훈련만 한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더라”며 “하지만 북일고 국제과에선 학생들이 스스로 공부하고 에세이를 쓰도록 일깨워준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학교측은 어떤 학생을 선발할까. 학교 측은 공부만 잘하는 학생이 아니라 다양한 자질을 가진 학생을 뽑는다고 설명했다. 해외 대학 선택 때도 무조건 명문대만 추천하지 않는다고 한다. 피승호 국제과 디렉터는 “아이비리그만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며 “아이들이 원하는 전공을 파악해 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전 세계 명문 대학 정보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아들이 국제과 1학년에 다니는 김정희(49)씨는 “1년에 수천만원을 내는 국제학교나 외국인 학교가 아니라 일반 자사고 학비만 내고 고학력 외국인 교사로부터 수업을 받을 수 있는 곳은 한국에서 북일고 국제과가 유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과 2학년 자녀를 둔 신계숙(45)씨도 “국내 학교 정규교육만 받고 해외 명문대에 진학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며 “소수의 학생이 기숙사 생활을 함께하기 때문에 우정도 끈끈하다”고 전했다.

 

국제과는 교사와 2학년 학생이 한 조를 이뤄 학생 관심 분야의 주제를 정한 뒤 꾸준히 연구해 논문을 발표하는 DRP(Directed Research Program)도 운영한다. 2학년 장승훈(18)군은 “DRP를 해야 졸업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졸업논문”이라며 “정규 수업이 끝나면 놀 수도 있지만 DRP 같은 장기 프로젝트와 과목별 과제, 에세이 등이 있어 시간관리를 철저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외국 대학에 가고 싶다고 무조건 이 과정에 입학하는 게 꼭 좋지만은 않다. 수업 수준이 높아 웬만한 영어 실력으로는 감당하기 벅차기 때문이다. 학교 관계자는 “입학 전 상담 오는 학부모가 많지만 실제 경쟁률은 1.3대 1 정도”라며 “수업 수준과 매일 해야 하는 영어 과제 등에 대해 설명하면 힘들겠다는 판단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영어 실력 때문에 중도 하차한 학생도 있다.

학생들이 원하면 강좌 만들어줘

 북일고가 국제과만 신경 쓰는 건 아니다. 이 학교 일반계열 과정의 교사 대 학생 비율은 1대 13.2로 일반고 전국 평균 1대 15.1에 비해 낮다. 강익수 교장은 “앞으로 계속 교사를 충원해 교사 한 명이 학생 10명을 지도하도록 할 계획”이라며 “교사에게 행정 업무를 맡기지 않고 수업시간 부담도 낮춰줘 수업의 질을 높이겠다”고 말했다. 이 학교 교사의 연령은 평균 40세로 젊은 편이다. 20~30대 교사가 45%를 차지한다.

 북일고는 지난해 교육부가 실시한 자사고 특성화 프로그램 운영계획 심사에서 최우수 학교로 선정됐다. 국내에선 처음으로 진로 맞춤형 교육과정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희망하는 진로에 따라 정규 과목은 물론이고 방과후 학교, 동아리활동까지 3년간 어떻게 학습할 것인지 계획을 세워준다. 천안 외 지역에서 온 학생은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한다. 전교생 85%가 기숙사를 이용 중이다.

 일반계열 1학년 배준현(16)군은 “기숙사에서 생활하면 한 달에 한 번만 집에 다녀올 수 있어 처음에는 낯설었다”며 “하지만 오후 6시 이후 과제 연구를 하거나 진로 관련 동아리활동에 참여할 수 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낸다”고 말했다.

북일고는 학생들이 원하면 주문형으로 수업을 개설해준다. 주문형 수업은 10~15명이 정원으로, 아이들끼리 인원을 모아 원하는 강좌를 해당 교사에게 신청해 듣는 방식이다. 일반계열 권오웅 교사는 “교과 관련뿐 아니라 영어인증시험,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자기소개서 작성 등 56개 주문형 강좌를 개설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일반계열 2학년 김도연(17)군은 “마음 맞는 친구 10명이 모여 수업 준비를 철저히 하는 선생님이나 특별한 수업 방식으로 인기 있는 선생님을 찾아가 수업을 신청해 듣는다”며 “그룹 과외 형식이어서 집중도 잘되고 부족한 과목을 배우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김군은 학기 중에는 토요일마다 1시간30분씩 영어 구문 독해 수업을 듣고 방학에는 매일 1시간30분씩 논술 수업을 듣는다.

일반계열 1학년 학생의 학업 수준은 전국 모의고사 1, 2등급 비율이 60%에 달할 만큼 높다. 특히 수학은 1, 2등급 비율이 70%에 달한다. 올 2월 일반계열 졸업생의 진학 실적은 SKY(서울·고려·연세대) 32명, 의·치·한의대 18명, KAIST 2명 등이다. 유영상 입학관리부장은 “전국 단위로 모집한 학생들이기 때문에 학업 수준이 높다”며 “영어와 수학 과목은 정규 수업과 방과후 수업 모두 수준별 이동수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북일고의 재단 지원금은 전국 단위 10개 자율고 중 가장 높은 연간 51억원(2013년 기준)이다. 이 학교 1년 예산의 35%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재학생들은 1인당 1450만원의 교육 혜택을 받는 셈이라고 학교 측은 밝혔다. 지난 2년간 250억원을 투자해 기숙사와 별관동을 증축한 데 이어 종합관과 체육관을 신축할 계획이다.

재학생이 부담하는 비용은 기숙사비와 식비, 방과후 수업비, 교복 등을 모두 포함해 연 980만원 정도다. 일반계열 1학년 자녀를 둔 김영미(45)씨는 “기숙사 생활을 하며 특화한 프로그램으로 교육을 받기 때문에 사교육을 따로 시키지 않아도 돼 좋다”고 말했다.

국제과 남녀학생 5명이 말하는 학교
"선후배 섞여 수업 듣는 무학년제
영어로 수업하니 나이 금방 잊어요"

Q. 수업을 영어로만 하는데 어렵지 않나.

A. 입학 후 첫 수업부터 난관에 부닥쳤죠. 기본적으로 영어를 잘하는 학생들이 입학하기 때문에 영어 수업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다기보다 수업과 생활 모두 영어로만 해야 하는 환경이 불편했어요. 선생님 말씀으로는 국제과 지원자의 토플 평균이 110점(120점 만점), 중학교 내신 평균은 5% 이내였다고 들었어요.

Q. 과제가 많다던데 어떤 것들인가.

A. 선생님별로 과제 스타일이 다양해요. 스페인어 선생님은 스페인어 영화를 보고 관련 활동을 해 보라는 프로젝트를 내줍니다. 경제학 선생님은 글로벌 기업 한 곳을 정해 주고 그 기업의 주가 분석을 해 보라고 했고요. 학생들은 그 주제로 포스터를 제작하거나 연극을 발표하는 등 다양한 표현방식으로 과제를 준비합니다. 자료를 찾고 결과를 도출하는 과정이 힘들지만 재밌어요.

Q. 기숙사 생활은 어떤지.

A. 국제과 여학생은 서밋홀 1층 기숙사에서 생활합니다. 남학생은 북일고 일반계열 친구들과 함께 기숙사를 쓰지만 수업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만나는 일은 별로 없어요. 그래도 축구나 농구 같은 운동은 종종 같이해요. 가장 힘든 점은 아침에 일어나 오르막길을 거쳐 식사하고 내려오는 일이 아닌가 싶어요. 국내 고교 중 가장 넓은 캠퍼스라 이동하기가 너무 멀어요. 몰래 야식을 시켜 먹기도 합니다.

Q. 국제과는 수준별 무학년제라 선후배가 같이 배우는데, 스트레스는 없나.

A. 각자 선택하는 과목에 따라 반이 배정되기 때문에 수업받는 학생 나이가 뒤죽박죽인 경우가 다반사죠. 처음 입학하면 어색할 수 있지만 한 달만 지나면 편해요. 생활이나 수업, 자습을 같이하기 때문에 나이를 잊게 돼요. 어차피 외국 대학에 진학하면 나이는 개의치 않잖아요.

Q. 외고나 특목고도 있는데 이 학교 국제과를 택한 이유는.

A. 국제과는 총 정원이 90명에 불과합니다. 소수 정예로 생활하기 때문에 우정도 깊게 나눌 수 있고 가족 같은 분위기예요. 성적 위주 공부만 해야 하고 경쟁해야 하는 게 아니라 자유롭고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는 곳인 것 같아요. 그게 선택의 이유죠.

글=김소엽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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