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l8의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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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1953년6월18일을 지금도 흥분과 긴장속에서 기억하게 된다. 태극기의 물결, 계급장도, 일체의 군장도 없는 카키복의 청년들이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뛰어다니던 일들, 시민들은 사지에서 돌아온 아들을 맞듯, 집집마다 이 청년들을 기쁨으로 맞아 들였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 낯선 청년들을 누구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처럼 국민적인 단결과 약속이 지켜진 일은 일찌기 없었다.
반공포로가 석방되던 날이다. 이미 유엔측과 공산측은 휴전을 동의하고 있었다. 이대통령은 『휴전은 국가적인 자살』이라고 절규하여 실망과 분노의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조국이 또다시 한국의 국민적 의사와는 상관없이 분단되리라는 생각은 우리에게 더 없는 비탄과 소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도대체 반가울 것이 없는 휴전이었다. 실로 한국민의 결연한 의지는 이때의 상황에선 아무 소용도 없었다.
바로 이때 무려 2만7천여명이나 되는 반공포로가 오로지 우리의 의사로 석방된 것은 이만저만한 충격이 아니었다. 18일 영시 부산, 논산, 마산, 영천, 광주, 대구, 부평등 7개 수용소의 초소를 지키던 미군헌병들은 일시에 무력해지고 말았다. 그리고는 철조망이 파열되고, 밀물처럼 반공포로들은 터져 나왔다.
『한국청년들은 몸에 날개가 돋쳤는지, 불과 25분 사이에 8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당시의 한 미국기자는 이렇게 타전했었다.
곳곳에서 시민들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들을 집으로 맞아 들였다. 그것은 누구의 강요에 의한 것도 아니었다.
세계의 여론이 분분한 것은 당연했다. 『휴전은 기어이 깨지는가보다』하는 의문마저 일부에선 가졌었다. 만일에 이런 충격이 없었다면 유엔의 한국에 대한 책임은 훨씬 더 가벼워 졌을지도 모른다. 또한 반공포로들은 허무한 협정드라머에 의해 또다시 공산지역으로 끌려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일도 없이 모든 일은 끝나고 말았다.
대인풍의 정치는 개인의 역량인지 국민의 의지에서 우러나오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다. 다만 우리는 그 뜨거운 국민적·자주적 열의가 회상될 뿐이다.
오늘에도 필요한 것은 바로 그런 숙연한 마음가짐과 이성적 국가상황인 것 같다. 자주·자립·자각은 언제나 우리의 상황을 새롭게 이해시켜 준다. 6월18일의 갑진 교훈이 있다면 그런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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