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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유혹하는 매력적인 ‘죽음’ 역할에 미친 듯 빠져들었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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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호 17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황실 역사상 가장 아름다웠던 황후 엘리자벳. 전 유럽에 혁명의 기운이 들끓던 19세기 말, 저물어가는 황실의 상징과 같았던 그녀는 ‘오스트리아판 다이애나비’에 비유될 만큼 아직도 국민적 사랑을 받는 존재다. 그러나 그녀가 시집온 이후 황실 주변인들이 속속 불행한 죽음을 맞았다는 이유로 ‘죽음과 춤을 춘 왕비’로 불리기도 한다. 그녀의 일생을 소재로 한 빈(Wien) 뮤지컬 ‘엘리자벳’의 또 다른 주인공이 ‘죽음’을 의인화한 아름다운 청년인 이유다.

뮤지컬 무대 도전해 화제몰이, 가수 박효신

지난해 국내 초연 당시 더뮤지컬어워즈 8관왕, 평균 유료객석점유율 90%, 상반기 흥행 1위 등 화제를 몰고 다녔던 뮤지컬 ‘엘리자벳’(9월 7일까지 예술의전당). 2013년 앙코르 공연의 가장 인상적인 캐스팅은 바로 ‘토드(죽음)’ 역의 가수 박효신(32ㆍ사진)이다.

지난해 제대 이후 본격적인 첫 활동을 음반이 아닌 뮤지컬로 시작한 것은 뜻밖이었다. 1999년 데뷔해 벌써 14년차 가수인 그는 노래 실력에 관한 한 수많은 에피소드를 가진 자타공인 ‘가창력 본좌’지만, 한때 ‘소몰이창법’의 대명사로 통하던 그의 자유로운 발성이 뮤지컬 드라마에 녹아들 수 있을지, 연기력은 받쳐줄지 우려도 많았다. 하지만 뚜껑이 열리자 객석은 마성의 가창력에 홀려 ‘박효신 토드 시대의 개막’에 열광하고 있다. 데뷔 초 ‘락햄릿’에 출연한 이후 13년 만에 서는 두 번째 뮤지컬 무대지만 ‘삶보다 매력적인 죽음의 유혹’이라는 고난도 미션을 ‘미친 듯이 공부해’ 소화하고 있다는 그를 만났다.

뮤지컬 ‘엘리자벳’중에서

심하게 탈색된 금발에 메탈릭한 올블랙 의상, 중성적 느낌의 짙은 화장을 한 날카로운 눈매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둡고도 화려한 아우라. 13일 밤 커튼콜 후 무대를 빠져나온 박효신은 연약한 인간심리를 파고드는 아름답고도 치명적인 유혹의 결정체 ‘죽음’에 흠뻑 취해 있었다.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손에선 놀랄 만큼 뜨거운 피가 느껴졌다. 숨 막히는 현실에 괴로운 여인이라면, 그림자처럼 맴돌며 “내 품에 안기라”고 손짓하는 이 청년의 차갑고도 뜨거운 유혹에 홀딱 넘어갈 법도 했다.

뮤지컬 ‘엘리자벳’은 웅장한 음악과 화려한 무대로 초연 때부터 관객을 사로잡았지만, 사실 ‘죽음’ 캐릭터엔 말이 많았다. ‘죽음’을 의인화한 판타지가 우리 정서에 맞지 않고, 도대체 왜 ‘죽음’이 엘리자벳을 유혹하는지 내러티브를 납득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인간과 사랑의 ‘밀당’을 하면서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어야 하는 초현실적인 캐릭터에 대한 감정이입이 쉬울 리 없었다.

박효신은 그런 ‘죽음’ 캐릭터의 구멍을 마법처럼 메워버렸다. 청중의 감정을 흔드는 호소력 짙은 발성은 실연의 슬픔을 간직한 아름다운 청년의 인간적인 느낌을 주며 공감의 장을 만들었다. 또 중저음과 고음역을 힘들이는 기색도 없이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주변인을 묻어버리는 ‘초현실적’ 성량은 모든 시각적 스펙터클을 능가했다. 이 무대를 지배하는 집요한 ‘사랑’에 더 이상 논리는 필요 없었다.

마치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배역인 양 ‘죽음’에 완벽히 빙의되어 무대를 휘젓고 있는 박효신이지만, 시작은 우연이었다. 지난해 말 음반 준비를 하다 무심코 구경간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내한공연 무대가 모든 걸 미루고 뮤지컬 출연을 강행하게 된 계기가 됐다. “전날 잠을 못 자 무척 졸린 상태였죠. 그런데 잠이 싹 달아났어요. 팝페라적 발성이 뮤지컬의 한계라 늘 생각했었는데, 팝과 클래식을 오가며 웅장함과 애절함을 섭렵하는 브래드 리틀의 팬텀이 너무나 충격적이었죠. 나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자꾸 들었어요.”

뮤지컬 ‘엘리자벳’중에서

잠까지 포기하며 ‘토드’ 캐릭터 분석
이틀 동안 팬텀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3일째 다시 극장을 찾았다. 이번엔 냉정한 정신으로 무대와 노래 스타일을 낱낱이 머리에 담았다. 그 후 ‘레베카’를 보고선 또 한번 놀랐다. 13년 전과는 전혀 달라진 우리 뮤지컬의 수준을 실감한 것. “정말 우리나라 극장이 맞나 싶고, 막연히 가슴이 뜨거워졌어요. 공연 준비, 앨범 준비를 해야하는데 저 사람들과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 거예요. 늘 무대에 혼자 서며 외로웠는데, 무대 위에서 뒤엉키는 모습들이 부럽기도 했고요.”

때마침 ‘엘리자벳’ 오디션 제의가 들어왔다. ‘팬텀’에 푹 빠져있던 그에게 ‘토드’는 맞춤옷이었다. “제의가 감사해 대본부터 미친 듯이 공부했죠. 토드에게서 팬텀처럼 한 여인에 대한 갈구와 욕망이라는 비슷한 흐름을 느꼈어요. 이만한 역이 없겠다 싶었죠. 팝적이면서 이질감도 있고, 뭣보다 토드는 정해진 틀이 없거든요. 그래서 더 어렵지만 전 원래 한계점을 넘어보는 걸 좋아해요. 도전하고픈 마음이 들게 하는 역할이었어요.”

준비 기간이 빠듯했지만 잠자는 시간을 포기하고 캐릭터 분석에 매달렸다. ‘사람보다 매력적인 죽음’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빈 원작과 영화까지 뒤져 공부하면서 그가 내린 결론은 ‘강하면서도 부드러워야’ 했다. “저승사자는 너무 뻔하잖아요. 인간을 사랑하게 돼서 인간을 유혹하려면 인간다운 모습도 보여주고, 강하게 존재감을 어필하기도 하는 두 가지 느낌을 다 아우르고 싶었어요. 저는 토드 캐릭터 때문에 이 실화가 너무 잔인하거나 비참하게 보여지지 않아서 좋아요. 우리 삶이 태어나 죽는 게 똑같잖아요. 사실 ‘엘리자벳’은 잔인한 얘기죠. 황후도 인생이 힘들고 외롭다는 얘긴데, 누구나 가진 고통을 극을 통해 해결은 못해 줘도 작은 해소 역할을 해주는 게 판타지잖아요. 엘리자벳의 비극을 너무 잔인하게 만들지 않는 부드러운 역할이 바로 토드인 것 같아요.”

커튼콜 땐 태양 빛 향해 인사하는 기분
애드립에 강한 뮤지션 박효신은 뮤지컬 무대에서도 자기 식으로 재해석한 넘버들로 남다른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통상 라이선스 뮤지컬의 원작곡가들은 자기 음악을 변형시키는 걸 엄격히 금지하지만, ‘엘리자벳’의 실베스터 르베이는 박효신의 애드립을 환영했다. “르베이의 음악은 팝적인 느낌이 강해서 지킬 건 지키되 조금씩 바꾸기가 수월해요. 그래도 그가 싫어할까봐 걱정했는데 오히려 굉장히 좋아하면서 제가 어떻게 바꿔도 허락하겠다고 해주셨어요. 노래에 어려움은 없지만 가사 전달력이나 표현력이 신경 쓰여요. 가요와 전혀 다른 가사에 맞는 옷을 입히는 데 시간도 많이 걸렸고요.”

말은 이렇게 해도 객석에서 바라본 그의 연기력은 놀랄 만한 수준이다. 홀로 밧줄을 타고 내려와 섬찟한 웃음소리로 극장 전체에 찬물을 끼얹고, 침대에 걸터앉아 엘리자벳을 유혹하는 장면 등은 도저히 연기 초보로 보이지 않는다. “연기를 늘 해보고 싶었어요. 영화를 볼 때도 위험할 정도로 빠져들죠. 토드는 걸음걸이 하나도 평범하면 안 되기 때문에 모든 장면에서 역할에 빙의돼야 하니 무대로 나가기 한참 전부터 빠져들어야 해요. 그렇게 공들이는 만큼 모든 장면에 애정이 가요.”

연기를 하고 싶은 이유는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어서’란다. “가수가 화려해 보여도 쳇바퀴 도는 생활이거든요. 앨범 구상하고 곡 쓰고 공연하고, 늘 똑같아요. 그러니 다른 인생을 경험해보고 싶어져요. ‘엘리자벳’도 결국 인생에 관한 얘기잖아요. 겉으로 화려한 왕비의 인생이 알고 보면 비극이란 건데, 연예인도 빛이 좋은 곳에 있어 보여도 순간이거든요. 화려함 뒤의 외로움, 보여지는 것 때문에 말 못하는 것들에 많이 공감이 가요. 옥주현 누나가 ‘네 외로움을 그대로 표현하면 될 것’이라고 조언해준 것도 도움이 됐어요.”

서른두 해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가수로 살면서 잠실종합운동장 같은 대형 공연장에서 라이브 무대를 전문으로 해 왔지만, 뮤지컬 무대가 주는 느낌은 전혀 다르단다. 리허설을 위해 텅 빈 오페라극장에 처음 섰을 때의 긴장과 감동은 잊을 수 없다고. “내가 이런 데서 노래할 날도 오는구나 싶었어요. 내 모든 걸 걸자고 다짐했죠. 아직도 커튼콜 때면 기분이 묘해요. 콘서트 땐 팬 한분 한분과 눈 맞추면서 인사하는데, 여기선 많은 분들이 기립해 주실 때 감동이 달라요. 마치 엄청난 태양 같은 빛을 향해 인사하는 기분이에요.”

다소 충동적으로 뮤지컬 무대에 서게 됐지만, 호기심에 일회성으로 그칠 생각은 아니다. 판타지적이고 자유로운 캐릭터를 경험했으니 이제 진중한 역할에도 도전해보고 싶단다. “한번 더 시험대에 올라보고 싶어요. 가수로서도 어려서부터 타고났다 소리를 많이 들었지만 사실 노력한 부분이 더 많거든요. 뮤지컬도 정말 제대로 한다는 얘길 듣고 싶어요. 이번에 제 무대에 말이 많을 거라 예상했지만 뮤지컬에 대한 닫힌 느낌을 깨고 싶어 도전했어요. 조승우씨도 처음엔 배우가 노래를 잘할까 선입견이 있었지만 보란 듯이 최고가 됐듯, 제가 가수이긴 해도 열심히 하면 연기도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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