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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년 '젠틀맨'이 뽑은 젠틀맨, 시사평론가 이철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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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은 자신의 인기 비결에 대해 다음과 말했다. “일단 상대 얘기를 존중해야 한다. 다르다는 게 틀리다는 건 아니니까.” [프리랜서 윤현식]

시사평론가 이철희(49) 두문정치전략연구소 소장.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전개된 각종 ‘토론 전쟁’에서 좀 두각을 나타내는가 싶더니 어느샌가 ‘야권의 마이크’가 된 듯한 인상을 받는다. 요즘 정치 주제 TV 토론의 단골 멤버 중 한 명이 됐다.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그를 남성 라이프스타일 잡지 ‘젠틀맨’이 전격 인터뷰했다. 창간 1주년을 기념해 ‘젠틀맨’이 선정한 ‘뉴젠틀맨’ 12명 중 정치권에선 유일하게 그가 포함됐다.

 그는 본래 정치인 출신이다. 1993년 국회의원 비서로 정치에 입문해 현재 민주당 대표인 김한길 의원의 보좌관을 거쳤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엔 청와대 행정관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이 같은 이력은 시사평론가로서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하다. 현실 정치의 장단점을 피부로 느껴본 점은 장점일 수 있지만, 어느 한 정파의 이해관계에 관련돼 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그가 대중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간 계기는 JTBC의 시사·예능 비평 프로그램 ‘썰전’에 고정출연하면서부터다. 함께 출연하는 방송인 김구라씨와 강용석 전 의원에 비해 인지도가 낮게 출발한 그였지만 방송이 계속되면서 인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시원한 직설화법과 간간이 섞여 나오는 유머로 인해 최근엔 팬카페까지 생겼다.

 방송이 회를 거듭하면서 어느 한 정파나 진영을 무조건 두둔하지 않는 유연함을 보이고 있다. ‘젠틀맨’ 인터뷰에서 그는 “박근혜 대통령이 잘했으면 잘했다고 하고, 야당이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하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22일 전화통화에서 “좌우 어느 편도 아닌, 중간에 서 있는 다수 사람들의 의견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특정 진영을 편들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얄미운 캐릭터로 보일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는 말을 다시 하기도 했다.

 이 소장은 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정책연구원의 부원장을 지냈고, 정도전·장량·순욱 등 역사적 인물을 통해 정치를 되돌아 보는 『1인자를 만든 참모들』(2003년)이란 책을 펴내기도 했다.

`젠틀맨` 9월호 표지.

 다음은 잡지 ‘젠틀맨’ 9월 호 특집에 실린 인터뷰다. 표현과 분량의 일부를 신문에 맞게 조정했다.

 

 -‘썰전’이 키운 최고의 스타는 방송인 김구라나 강용석 전 의원이 아니라 당신인 것 같다.

 “인지도로 따지면 김구라씨나 강용석 전 의원이 더 높을 거다. 다만 강용석 전 의원이 알든 모르든 일단 얘기를 시작하는 편인데 반해, 나는 그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내가 할 얘기만 한다. 그러다 보니 묘한 균형이 생긴 것 같다. 상대의 얘기를 존중하는 게 기본 자세다. 다르다는 게 틀렸다는 건 아니니까. 그런 점이 좀 관심을 끌지 않았나 싶다.”

 - 상대 패널로 강용석 전 의원이 나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어땠나.

 “처음에는 좋아하지 않았다. 사적으로 만난 적도 없었다. 소위 참여연대 같은 진보 진영에 있다가 공천을 새누리당에서 받아 나갔으니까 썩 유쾌한 사람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방송 못한다고 했었다. 말 섞기 싫다고(웃음). 하지만 함께 방송해보니 인간적 매력이 있더라. 난 특정 진영의 논리를 대변하기 위해 나온 사람이 아니다. 너무 엄격하게 굴 필요는 없었다. 옳은 얘기, 내 얘기를 할 수 있으면 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잘했으면 잘했다고 하고, 야당이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하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 진보 성향 인사들은 대개 말하는 방식 때문에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데.

 "소위 ‘같은 편’을 흥분시키는 토론은 하기 싫다. 같은 진영 안에 있는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 스타가 되고 싶지는 않다. 좌우 어느 편도 아닌 중간에 서 있는 다수 사람들의 의견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들을 설득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 진보 논객이라면 대부분 진중권·유시민을 떠올린다. 그런데 다수 사람들의 반응은 ‘당신 말이 옳긴 한데, 그래서 뭐?’ 정도다. 그런 이들과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인 성향이 좀 그렇다. 서로의 얘기를 들어주려고 하는 건 중요한 일이다. 듣지도 않겠다며 귀를 막는 건 문제다.”

 - 남성연대 성재기 대표의 장례식장에 갔었는데.

 “살면서 이념을 의식하고 사는 순간이 얼마나 되겠나. 얼마 안 될 거라고 생각한다. 이념과 성향은 중요하지만 그걸로 인간의 모든 행동을 설명할 수는 없지 않겠나. 성재기라는 친구를 사석에서 몇 번 만났고 술도 몇 번 마셨다. 나와 주장은 다르지만 ‘저 친구 참 괜찮다. 순수하다’고 생각했다. 방송이나 인터넷상에서는 굉장히 강한 캐릭터처럼 보였지만, 사석에서는 굉장히 부드러웠고, 인간적이고 정이 갔다. 서로의 입장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그거면 충분하다. 그래서 장례식에 갔다. 이념을 떠나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다.”

 - 당신을 진보 혹은 좌파라고 부르는 게 맞는가.

 “정치적으로는 분명 진보다. 우리 사회에는 지킬 것보다 바꿔야 할 게 훨씬 많다. 사회적 약자들의 기본권, 삶을 지켜줘야 한다. 하지만 사회적·도덕적으로는 보수에 더 가깝다. 동성결혼 박해엔 반대하지만, 솔직히 좋아하진 않는다. 북한 지도부는 나쁘다고 생각하지만, 북한을 변화시키는 방법으로는 햇볕정책이 맞다고 생각한다. 문화적으로도 보수적이고, 전형적인 가부장적 모습도 있다(웃음). 그건 나뿐만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 다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한다.”

‘썰전’ 촬영 뒤 방송인 김구라(사진 왼쪽부터)씨와 이철희 소장, 강용석 전 의원. [중앙포토]

 - 그렇다면 보수와 진보 양쪽에서 다 애매한 스탠스로 보이기 쉽다.

 “내가 얄미운 캐릭터로 보일 수 있다. 나는 특정 진영을 편들지 않으니까. 비판은 당연한 대가다. 평론할 때는 단순히 ‘이게 아니다’라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이렇게 했어야 한다’고 해결책을 제시하려 노력한다. 비록 내 말이 틀렸다 해도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무책임한 거다.”

 - 김한길 의원 보좌관, 김대중 대통령 시절의 청와대 행정관을 지내는 등 권력과도 가까운 자리에 있었다.

 “청와대 4급 행정관을 지낼 때는 나름대로 어깨에 힘도 들어가고, 자랑스러운 것도 있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부질없었다. 현실 정치의 주역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 4~5년 전 국회의원 한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래야 말을 들어주고 힘이 생기니까. 하지만 국회의원이라는 타이틀 자체가 매력적인 건 아니다. 만약 국회의원 되려고 했으면 특정 진영을 편드는 발언을 하고 있었을 거다. 지금은 방송이 생업이 됐기 때문에 충실하게 할 뿐이다. 이런 관찰자의 위치가 내게 더 어울리는지도 모르겠다.”

 - 왜 정치판에서 발을 뺐나.

 “잘됐으면 뺐겠나? 잘 안 되니까 뺐겠지(웃음). 뭔가 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 됐다. 2008년부터 자발적 백수가 됐다. 가진 게 없는 사람은 커리어 만들기와 돈벌이가 같이 가기 힘들더라.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하고 돈을 벌었는데, 대중적으로 알려지는 건 쉽지 않았다. 아내에게 4년만 시간을 주면 국회의원 한번 해보겠다고 하고 뛰어다녔는데 2012년 총선에서 떨어졌다. 마음이 상해 있었는데 누가 방송 좀 해보라고 했다.”

 - 앞으로 계획은.

 “2년 정도 후 결론을 내려 한다. 다만 방송을 내가 정치하기 위해서 이용하지 않겠다. 속보이는 목표를 갖고 사는 건 좀 염치없는 짓인 것 같다.”

 - 어떤 참모가 좋은 참모인가.

 “똑똑한 참모는 수없이 많다. 하지만 정말 최고의 참모는 ‘아닌 걸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참모다. 그런 참모가 있는 리더와 없는 리더는 큰 차이가 있다.”

 - 권력자들은 듣고 싶은 답만 원하지 않나.

 “그러니까 반대하는 데도 기술이 필요하다. ‘노’라고 말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노’를 받아들이게 하는 게 중요한 거다. 반대 의견을 던졌는데 그 말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툴툴거리면 그건 하수다. 거기서 한 발 더 고민해야 한다. 자신의 ‘노’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할 건지. 성공한 사람들은 이걸 잘한 사람들이다.”

 - 정치 컨설팅은 하고 있나.

 “안 한다. 컨설팅은 일종의 계약이다. 그 상황에서 내가 방송을 하면 일종의 모럴 해저드가 발생한다. 스스로 떳떳하기 위해 절대 하지 않는다. 누가 밥 먹자고 하며 자연스럽게 물어보면 부담 없이 해주지만 돈으로 관계 형성이 되면 못 한다. 그게 내 도덕이다.”

 - 안철수 의원에 대한 호감이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다. 인간적인 애정은 있다. 안 의원의 역할이 대통령이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치적인 역할이 분명 있다고 본다. 물론 안철수라는 정치인이 시대적인 요구를 잘 감당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높은 점수를 줄 수는 없다. 앞으로도 잘못하면 잘못했다고 얘기할 거다. 새누리당 의원이 내게 조언을 구해도 난 얼마든지 충고해줄 수 있다.”

 - 정치 거물을 많이 보았을 텐데, 그중 멋진 남자를 꼽는다면.

 “한국에서는 아직 모르겠다. 오바마 대통령을 만든 참모 중에 데이비드 액설로드라는 사람이 있는데 근래 본 사람 중에 멋있다고 생각했다. 기자를 하다 정치 컨설턴트가 된 사람이다. 수많은 거물이 같이 일을 하자고 해도 거절했지만 무명의 오바마가 같이 일을 하자고 했더니 흔쾌히 응했다. 그러곤 그 유명한 ‘Yes, We Can’을 만들어냈다.”

 - 좋은 지도자란.

 “마음을 주는 지도자다. 노무현 대통령은 좋은 정치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기량은 아쉬운 대목이 있었지만, 마음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뛰어난 정치인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 면에서 공과를 떠나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마음을 주고 마음을 얻는 사람이 최고의 지도자다.”

이기원 젠틀맨 기자
이상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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