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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해방에서 환국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1907년은 구한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기가 된 해이니 역사상 유명한 해아밀사사건이 발생한 것이 그해 6월이요, 그 일로 말미암아 고종황제가 양위를 한 것이 7월20일이요, 영친왕이 황태자로 책봉된 것이 9월이며,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으로 끌려간 것이 그 이듬해
12월임을 생각한다면 1907, 8 양년이 얼마나 다사다난한 해였던가를 잘알 수 있을 것이다.
영친왕의 아버님 고종황제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임금이 되고 대원군과 황후틈에 끼여서 만고풍상을 다 겪었고 결국은 나라를 잃고말았지만 결코 나쁜 임금은 아니었다. 시대가 나빴고 신하를 잘못 만나서 대사를 그르쳤으나 마음만은 항상 어떻게하면 독립을 유지하고 국권을 다시 찾느냐로 괴로웠다. 을사보호조약만 하더라도 일노전쟁에 승리하여 기고만장이된 일제의 강압으로 부득이 체결은 해놓고서도 민충정공의 순사와 함께 일제에 대한 원한은 날이 갈수륵 깊어갔다.
그리하여 필경 영어교사이며 황제의 고문인 헐버트박사를 통하여 화란국 해아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것을 알고 이상설·이준·이위종의 3씨를 대표로 헐버트박사를 고문으로하여 비밀리 해아에 파견하니 이것이 즉 「해아밀사」사건인 것이다.
최초 고종황제의 생각으로는 만국평화회의에는 당시의 강대국인 러시아를 비롯하여 세계의 열강이 다모인 자리이므로 일제의 강압으로 억지로 보호조약을 체결한 사정을 호소한다면 모든 것이 잘될 줄 알고 친서를 주어 보낸 것인데 막상 밀사들이 해아에 도착해서보니 원수의 보호조약때문에 "한국에는 이미 외교권이 없다"는 이유로 회의에는 정식참가를 못하고 겨우 각국 대표를 찾아다니며 일제의 침략과 한국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와같이 일이 뜻과같이 안되매 이준선생은 분통이 터져서 필경 해아에서 자결하고, 이상설선생은 해삼위로 망명하여 다시는 조국에 돌아오지못했으며 이 사실을 안 일제와 이등박문은 노발이 충천해서 고종황제로하여금 양위를 하지아니치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도 안심이 아니되었던지 일제는 또 한가지 계교를 짜내었으니 그것이 곧 황태자의 일본유학이었다.
영친왕은 고종황제의 일곱째 아드님으로 태어나서 그해 9월 큰 형님되는 순종황제가 즉위한 이듬해에 만 11세의 약관으로 왕세자가 되었는데 통감 이등박문은 명치천황의 이름으로 칙어까지 내어서 억지로 영친왕을 인질로 끌어간 것이었다.
그후 1910년에 한일합방이 되고 그로 말미암아 영친왕은 70 평생을 일본에서 보내게된 것이었다.
통감이등이 황태자의 일본유학을 제의했을때 태황제(고종황제)는 좀처럼 승낙을 하지않았다. "수학원에서 공부하면 될 것을 멀리 일본에까지 갈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 고종황제의 뜻이었고 영친왕의 생모 엄비는 "인질로 잡아 가는 것"이라고 펄펄 뛰었다. 그러나 이미 실권이 없어진 왕과 왕후의 말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결국 일본 명치전황의 칙어가 발포됨으로써 고종황제는 꼼짝없이 영친왕을 일본으로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고종황제와 엄비는 "훌륭한 황태자로 교육을 하고 매년 여름방학에는 꼭 한번씩 귀국하시게 하겠읍니다"라는 이등의 언질을 받고야 겨우 승락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약속은 이등이가 합이빈(하얼빈)역두에서 안중근의사에게 암살되고 육군대장 데라우찌(사내정의)가 그 후임으로 옴으로써 한번도 실현되지를 못하고 엄비는 사랑하는 아드님을 다시한번 만나지도 못한채 세상을 떠났으니 얼마나 애처로운 일이냐.
엄비는 자나깨나 영친왕이 보고 싶어서 사내총독을 만나기만하면 "태자를 한번 돌려보내주오"라고 졸랐다. 그럴라치면 사내는 정색을 하고 "조금만 더기다리십시오. 지금 학습원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시는 중이니까 중단이 되면 안됩니다."라고 번번이 거절하였다. 그와같이 냉담한 태도에 엄비는 "5년동안에 한번도 돌려 보내지않으니 너무하지 않소. 이등통감은 1년에 한번은 반드시 돌려보내겠다고 약속을 하였소. 아마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 당신네들의 상투수단인가 보오"라고 꾸짖었다.
그러나 일본의 군벌중에서도 경골한으로 유명한 사내에게는 통할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어머니와 아들은 다시한번 만나보지도 못하고 영원의 한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엄비는 덕수궁에서 열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 "아 태자가 보고싶다. 태자는 왔느냐"고 소리소리 지르다가 숨을 거두고 영친왕은 동경에서 모친별세의 전보를 받자 어마마마!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리하여 그날 밤은 이불속에서 밤이 새도록 울었다고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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