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3) 해방에서 환국 까지|김을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고종 황제가 세상을 떠나고 곧 이어서 삼·일 운동이 발발하니 일제는 물실호기라고 생각하였던지 이때부터 침략정책이 더욱 노골화하기 시작했다. 덕혜옹주가 일출 국민학교(지금의 퇴계로에 있는 일신) 4학년에 다닐 때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핑계로 싫다는 옹주를 억지로 일본으로 데려가고만 것이었다.
동경에 있는 학습원에서 공부를 하던 옹주가 19세가 되던 해 일제는 한국과 대마도가 지리적으로도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전 대마도 번주의 아들인 소오 백작과의 정략결혼을 강행하고야 말았다. 모르면 몰라도, 대마도는 여러 가지 점에서 일본본토와는 다르므로 교활한 일제는 이왕직으로부터 막대한 지참금까지 붙여서 대마도 반주의 아들과 한국 왕의 공주를 결합시킴으로써 소위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렸을 것이니, 만일 고종황제의 영혼이 있다면 또 얼마나 슬퍼하였으랴? 덕혜옹주는 처음 그 말을 듣고 사흘동안이나 음식을 전폐하고 울었으며, 그럴 때마다 옹주 앞에 있는 일본인 궁녀들은 누가 보는 데서는 『전하…』하고 공손히 절을 하다가도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에는 『정말 시집을 아니 갈테야?』하고 윽박질러서 가뜩이나 고독한 옹주를 더욱 고독하게 만들었고 또 공포에 떨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가기 싫다는 시집을 억지로 간 옹주는 결혼 후 수년만에 막사에라는 딸 하나를 낳고는 그만 정신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후 세월은 흘러 일본은 필경 태평양 전쟁에 패배하였고 그 바람에 한국은 대망의 독립을 하였다. 그러나 덕혜옹주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공주의 존재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말살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나는 전기 『고종황제와 김 시종』과의 관계를 잘 알고 있으므로 어쩐지 덕혜옹주의 일이 몹시 마음에 걸려서 동경에 도착하는 길로 소오 백작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 책을 보고 번호를 안 것은 물론이다.
옹주의 근황을 물으니 『입원 중』이라고 하면서 만나볼 필요가 없지 않느냐? 고 아주 냉담하게 전화를 끊었다.
그 이튿날 영친왕을 뵈었을 때 비로소 덕혜옹주는 영친왕이 매월 1만원씩을 내어서 동경교외 마쓰사와라는 정신병원에 입원중인 것을 알게되었다.
그 길로 나는 동경시내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쯤 가는 그 병원을 찾아갔다. 신경과병원으로는 일본에서 제일 오래된다는 마쓰사와 병원에 가보니 무슨 감옥과도 같이 음산한 공기가 떠돌며 중환자가 있는 병실은 마치 감방모양 쇠창살로 들창을 막고 있었다. 안내해 주는 간호부의 뒤만 따라갔는데 한 병실 앞에 이르자 간호부의 발이 딱 멈추었다. 그 안을 들여다보니 40여세의 한 중년의 부인이 앉아있는데 창백한 얼굴에 커다란 눈을 뜨고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 부인이 바로 덕혜옹주의 후신인 것이다. 아무도 없는 독방에서 벌써 여러 해(그때 벌써)를 우두커니 앉아있는 옹주가 어찌나 가엾고 불쌍한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리었다. 만일 고종황제가 이 광경을 보신다면 얼마나 슬퍼할까? 어느 나라이고 왕가의 종말에는 허다한 비극이 깃들이는 법이지만 고종황제의 고명따님 덕혜옹주의 말로가 이다지도 비참하게 될 줄이야 어찌 뉘라서 상상인들 하였으랴?
생각컨대 덕혜옹주는 정략결혼의 희생이 된 것이며, 구중궁궐에서 금지옥엽으로 세상을 모르고 자라나다가 환경이 돌변하여 일본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대마도사람과 강제 결혼을 하게되매 모든 것이 무섭고 구슬퍼서 필경 정신병환자가 된 것이 아닐까?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났다가 무슨 까닭으로 만리타향에서 「산송장」의 신세가 되었단 말인가?
나는 처참한 그 광경을 보고 병원에 갔던 것을 도리어 후회하게 되었으며 이제는 하루바삐 덕혜옹주를 데려다가 죽더라도 조국에서 죽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깊이 하였던 것이다. 소오 백작은 이미 여러 해 전에 다른 일녀에게 강가를 가고 무남독녀 정혜는 해방후 세상을 비관하고 집을 나간 채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하므로 영친왕은 더욱 그 누이동생을 측은하게 생각해서 항상 입버릇처럼 『옹주를 본국으로 데려가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자꾸 되풀이해서 말씀하는 것이었다.<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