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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시간 간직한 영친왕의「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영친왕의 빈소가 마련된 악선재에는 정부고관에서부터 백립에 휜 두루마기를 입은 무명의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비운으로간 황태자의 마지막 길을 추모하기 위한 조객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고 있는데….
3일 낮 12시쯤 빈소를 찾은 이경상씨(60·서울 동대문구 면목동 972)는 가로 8㎝, 세로 13㎝의 봉투를 꺼내들고 곡을해 종친과 조객들의 시선을 모았다.
봉투 앞면에는 주효료라고 인쇄되어 있고 뒷면구석에는 김이원이라는 고부도장이 찍혀있었다.
이 씨가 영친왕 빈소에서 공개한 봉투안에는 1943년에 발행한 50전짜리 일본지폐 4장이 들어 있었다.
이씨는 이 봉투를 50년이나 고이 간직하며 영친왕의 인자한 마음씨를 그렸다.
해방직전인 1945년 7월3일, 당시 동경철도국 여객전무로 근무하던 이씨는「모리오까」(성강)발「우에노」(상야)행 제108열차를 타고 있었다.
기차가「우쓰노미야」(자도궁)역에 닿았을 때 황족전용의 특별객차가 연결되자 영친왕 이은씨가 육군중장 정복을 입고 차에 올랐다.
영친왕은 당시「닉고」(일광)에 있던 학습원에서 공부하고 있던 아들 구씨를 만나보고 동경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이씨는 영친왕이 탄 객차 뒷문에 지켜서 있었다. 황족이 탄차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여객전무 뿐이었다.
차에 오른 영친왕은「망토」를 벗어 곁에선 이씨에게 건네주었다. 이씨는『저는 조선사람이며 본관이 전주입니다』고 일본말로 말하자 영친왕은 놀라며 많은 이야기를 건네었고 『꿋꿋이 살라』고 격려까지 해주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기차가「오미야」(대궁)역에 이르렀을 때 영친왕은 무관을 통해 봉투를 이씨에게 내렸다. 이씨는 영친왕이 준 돈 봉투를 가장 소중한 기념품으로 간직, 귀국후 6·25때도 몸에 지니고 다녔으며 집안 식구들이 뜯어 보자고 졸라도 막무가내로 보여주지 않은 채 보관해 왔었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인천시 용현1동산 5번지에 사는 장교헌씨(76)는 영친왕의 빈소에 찾아와 호곡하여 주위의 눈길을 끌었다. 그는 14살때 이은씨가 일본에 볼모로 끌려갈 때 분봉을 못 참아 왼쪽 인지를 작두로 잘라『태자 전하께서 미원으로 끌려갔으니 하루 빨리 돌아오라고 혈서를 썼다』고 잘린 손가락을 내보였다.
장씨는 또 14세때 만들었다는『이은 황태자 만만세』라고 새겨진 태극기를 펼쳐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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