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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의 생애|김을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영친왕 이은씨가 필경 세상을 떠났다. 1963년 11월22일 귀국하여 70년 5월1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비록 병석에서나마 약 6년반동안을 그리운 조국에서 마지막 생애를 보낸 셈이다.
「해아밀사」사건으로 격노한 일제는 고종이 또 무슨 일을 할 지 모르므로 황태자를 인질로 끌어갈 결심을 하였다.
그리하여 이등통감이 황태자의 일본 유학문제를 제의했을 때 고종은 좀처럼 승락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 공부하면 될 것을 멀리 일본에까지 갈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 황제의 의견이었고 영친왕의 생모「엄비」는『인질로 잡아가는 것』이라고 펄펄 뛰었다. 그러나 이미 실권이 없어진「왕」과「왕후」의 말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결국 엄비는 이등으로부터 『해마다 여름방학에는 꼭 한번씩 귀국하시게 하겠습니다』라는 언질을 받고야 겨우 승락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의 그 약속은 이등이「하르빈」역두에서 안중근의사에게 피살되고 사내정의가 후임으로 옴으로써 한번도 실현되지를 못하고 엄비는 사랑하는 아들을 다시 한번 만나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났으니 얼마나 애처로운 일이냐.
엄비는 자나깨나 영친왕이 보고 싶어서 사내총독을 보기만 하면『태자를 한번 돌려 보내주오』라고 졸랐다. 그럴라치면 사내는 경색을 하고『조금만 더 기다리십시오. 지금 학습원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시는중이니까 중단이 되면 안됩니다』라고 번번이 거절을 하였다.
그와 같이 냉담한 태도에 엄비는 얼굴에 노기를 띠고『5년동안 한번도 돌려 보내지 않으니 너무하지 않소』라고 꾸짖기까지 했다.
그러나 일본의 군벌중에서도 완강하기로 유명한 사내에게는 통할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어머니와 아들은 다시 한번 만나보지도 못하고 영원의 한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엄비는 덕수궁에서 열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아아- 태자가 보고 싶다. 태자는 왔느냐』고 소리소리 외치다가 숨을 거두고 영친왕은 동경에서 모친별세의 전보를 받자『어마마마』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자리에 쓰러졌다. 그리하여 그날 밤은 이불 속에서 밤에 새도록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영친왕이 나어린 왕세자의 몸으로 처음 일본으로 갈 때에 고종황제는『너 일본에 가거든 슬픈일이나, 기쁜일이나 아에 얼굴에 나타내지를 말고 조심하라』고 타일렀다. 그때문인지 영친왕은 아예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따라서 기쁜일이 있어도 소리를 크게 내어 웃는 일이 없었고, 슬픈일이 있으면 이불속에 들어가 혼자서 우는 것이 아주 제2의 천성처럼 되었었다. 해방후 허다한 난관을 돌파하고 평생 그리워하던 조국에 돌아와서도 병상에 누운채 거의 7년동안이나 말 한마디가 없었으니 영친왕의 고독과 침묵은 타고난 운명이라고 할까.
『춘초는 연년록인데, 왕손은 귀부귀』라는 말이 있다. 내년봄 아니, 내후년 봄에도 창덕궁 앞뜰에는 춘초가 무르녹으련만 영친왕은 돌아가서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니 얼마나 섭섭한 일이냐? 이로써 구왕실 최후의 황태자는 만고의 한을 품은채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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