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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일생…이조 최후의 왕세자|영친왕 이은씨…유명달리하던 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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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비운의 왕자 영친왕 이은 씨는 70평생을 두고 가슴에 맺힌 숱한 사연을 한마디도 남기지 못한채 운명했다. 11살때 불모로 일본에 갔다가 63년11월에 환국한 뒤 줄곧 의식이 흐려진 채 병상에 누워 있던 비운의 이조 마지막 왕자는 1일 새벽 병세가 갑자기 악화, 성모병원에서 낙선재로 옮긴지 30분만인 하오 1시 아무말 없이 한 많은 일생을 마치었다. 영친왕이 운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문화재관리국장 허련씨가 제일 먼저 낙선재로 달려와 조의를 표했고 조카인 이수길씨도 급히 달려왔다. 사무요원등 약 10여명의 낙선재 직원들은 깊은 슬픔에 빠졌다. 유해가 안치된 낙선재 본관의 문은 굳게 닫히고 이건웅씨가 신관 사무실에서 빈소차리는 것을 지휘하고 있었다. 낙선재측은 이은씨의 빈소를 신관사무실 자리에 조촐히 마련하는 한편 친척·친지들에게 부음을 알렸다. 부음을 듣고 제일 먼저 달려온 조객은 문화재 관리국장 허련씨. 그 다음이 이수길씨 내외, 영친왕 70회 생일기념으로 세워진 명휘원 원장, 김복점여사, 서일교 총무처장관, 전택보 천우사 사장등이었고 하오 3시 별세 소식이 알려지자 조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하오 1시50분쯤 이조 마지막 황후인 순종 왕비 윤비의 상궁 김명길(77), 성옥염(51), 박창복 (68)씨등 3명이 영친왕 빈소 앞 응접실에 와서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이들 상궁들은 낙선재 뒤에 있는 석복헌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이날 하오 1시30분쯤 외출할 일이 있어서 함께 나왔다가 돈화문 앞을 지날 무렵 신문사 차가 낙선재 쪽으로 질주하는 것을 보고 낙희재로 와서 영친왕의 별세소식을 들었다는 것이다.
상궁 김씨는 13세때 궁중에 들어온 후 영친왕이 방자 여사와 결혼하던 해에는『통역으로 일본에 건너갔던 일이 있었다』고 회상하면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이날 운현궁의 박찬주여사도 상오9시 양주에 있는 목장에 볼일 보러 갔다가 하오1시 서울로 돌아와 불의의 소식을 낙선재에서 달려온 사람들로부터 듣고 소복 차림으로 낙선재로 달려갔다.

<장지는 금곡릉에>
영친왕의 장지는 3년전 이미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 금곡리 금곡릉에 마련되었다. 영친왕의 묘옆에는 윤황후의 묘가있다.

<매달 40만원 생계비>
이은씨는 귀국이후 문화재 관리국에서 매달 40만원씩 지급하는 생계비로 생활해 왔다.

<귀국전 이미 실어증>
이은씨는 1957년8월 일본에서 처음으로 뇌헐전증이 발병, 동경의 산왕병원에 입원했었다. 주치의인 가톨릭의대 김학중박사는 63년5월 그가 일본으로 이은씨를 찾아갔을 때는 이미 뇌졸증이 3번이나 발병했고 실어증까지 겹쳐 있었다고 말했다.
63년 가을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배려로 귀국한 이은씨는 그때만 해도 말은 한마디 못했지만 가느다란 의식은 있었다.
북악산이 건너다 보이는 613호 병실에 여장을 푼 이은씨는『여기가 한국입니다』라는 측근들의 말을 듣자 가슴이 벅찬듯 3번이나 목을 놓아 울었었다.
말 한마디 못했던 그가 56년만에 조국에 돌아와 나타낸 기쁨의 표현은『흑흑』하고 울부짖는 소리뿐이었다. 귀국하던 해 문병간 장면씨를 잡고도 1시간동안이나 울었고 며칠뒤 임병묵씨가 찾아가자 또다시 통곡을 해 그다음부터는 일절 면회를 금지시켰다. 68년 10월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이후락씨를 잠깐 만난 것을 마지막으로 외부인사와의 면회는 금지되었다. 6년반동안 접촉해 본 외부인사는 겨우 3명뿐.
주치의 김박사와 간호원외에는 방자 여사가 하루 1번 정도로 다녀갔고 외아들 이구씨가 며칠 만큼씩 들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66년 여름부터는 입으로는 물도 못 넘기고 코에 고무줄을 끼워 유동식을 했다.
성모병원에서 제일 시설이 좋은 특실에 자리잡은 이은씨는 지난해 여름까지만해도 상태가 좋을 때는 간호원의 도움으로 휠체어를 타고 바람도 쐬었고 텔리비젼과「라디오」도 즐겨 듣고 보았다.
운명하던 날 새벽 3시쯤 갑자기 용태가 악화, 밤을 새워 가며 병실을 지키던 박경애 간호원이 김박사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 위기를 알렸다.
전화를 받은 김 박사가 이날 상오 5시쯤 병원에 도착하자 이은씨는 눈을 감은채 이미 숨결이 고르지 못했다는 것. 사태를 짐작한 김박사가 이날 상오 5시쯤 낙선재로 연락, 약 20분 뒤에 방자여사와 이구씨가 달려오고 9시쯤에 조카 이수길씨가 도착,『병원에서 돌아가시게 하고 싶지 않다』는 가족들의 요청에 따라 앰블런스로 낙선재로 옮기자 곧 아무 고통없이 숨을 거뒀다.

<낙선재도착 30분후>
금혼식인 지난 4월28일 이구씨가 병원을 찾았을 때도 이은씨는 의식이 흐려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었다.
이날 상오 주치의 김학중씨가 이은씨의 용태가 위독하다고 낙선재에 알려 방자여사와 이구씨 부처가 성모병원으로 달려갔고 운명이 가까왔다는 주치의 의견에 따라 이날 정오 지난 63년 11월에 환국과 동시 입원했던 성모병원 6병동 13호실을 앰블런스로 떠나 12시30분 낙선재에 도착했다.
낙선재 본관에 자리를 펴고 누운 이은씨는 30분만인 1시 잠자듯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이은씨의 임종은 부인 방자여사, 아들 구씨, 며느리「주리어」여사, 주치의 김학중씨, 종친회 이사장 이건웅씨 그리고 7년동안 치료를 해왔던 간호원등이 지켜보았다.

<11세때 일제의 볼모로…이역의 하늘서「쓸쓸한 청춘」을 묻고…
영친왕 이은씨는 1897년 11월20일 엄비 소생으로 경운궁(현 덕수궁) 숙추재에서 태어났다. 4세때 영친왕으로 명명되었고 1907년「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하자 순종과 윤비사이에 아들이 없어 황태자로 책립되었다. 이 당시는 일본의 침략적 야욕에 저항하는 의병이 곳곳에서 봉기하고 있었고「콜레라」까지 만연, 민심이 어지러운 때였다.
1907년10월16일 일본 황태자「요시히또」(가인·후에 대정천황) 가 친선 방문차 내한, 황제와 영친왕의 영접을 받고 영친왕의 방일을 요구했다.
그해 12월 11세의 영친왕은 온 국민의 노여움 속에 엄주명·조대호·서병갑등 신하를 대동하고 인천에서 일본군함 만주환에 올라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에 도착,「아까사까」(적판)의 이궁에 숙소를 정하고 영어와 일어를 공부했으나 가정의 분위기에 굶주린 어린 은은 항상 고독하게 지냈다.
은씨의 외사촌이며 유학을 같이 갔던 엄주명 씨는『간혹 얼굴에 엷은 미소를 나타냈을 뿐 회노애락을 노골적으로 표시하지 않았다.
온종일 책만 보고 공부밖에 몰랐으며 일본 육사재학시는 모범우등생이었다.
처음 일본에 도착한 2년간은 어학과 일본화를 위한 준비를 마친뒤 이어 황족과 귀족의 자제들이 다니는 학습원을 거쳐 유년학교, 사관학교에 진학, 1917년 일본육사 29기로 졸업하여 소위로 임관됐다.
영친왕은 20년 4월28일 일본 황족인 이본궁가의 방자와 결혼했다.
그는 결혼식을 조선식으로 하기를 원했으나 이것마저 묵살된 채 육군소위의 예복을 입고 양장에 조선 왕비의 관을쓴 방자와 일본의 전통적 결혼식인 「오가사하라」(소립원) 식으로 식을 올렸다.
식장에서조차 조국을 잃은 민족의 울분은 동경 유학생 서상한이 이완용과「사이또」(재등실) 총독을 죽이려고 했던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방자 여사는 미녀로 이름나 한때는 현 일본천황 유인의 비 후보로 오르기도 했으나 정략결혼으로 영친왕의 아내가 되었다.
결혼후 영친왕은 방자 여사에게『나는 이미 순수한 조선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게 됐소.-그렇다고 일본 사람이 될 수도 없는 일이고 결국 이것도 저것도 아닌 존재밖에 될 수 없단 말이오.』『조선문제가 화제에 오를 때의 그 압박감, 일본사람들은 일본 사람대로 이상하게 신경을 쓰고 나는 나대로 무슨「타부」에 저촉이나 되는 듯이 일부러 언동해야 한단말야, 마치 이중인격자 처럼 굴어야 할 때의 답답함이란…』이런 얘기를 나눈 것으로 보아 인간적 고독에 젖어 있었음을 알 수 있겠다.
영친왕은 일본에 간지 5년만에 엄비가 돌아갔을 때 조국을 다녀간 것을 비롯, 전쟁이 끝날 때까지 10여차례 다녀갔고 27년 5월에는 방자 여사와 군사시설 시찰을 명목으로 구미를 순방하기도 했다.
영친왕은 양란 재배에 권위가 있었고 테니스, 승마, 골프, 그림등을 즐겼다.
전쟁이 끝나자 45년 10월18일 신적(신적) 강하로 황족생활과 손을 끊고 어려운 생활을 해 오던중 63년 11월22일 박 대통령의 배려로 56년간의 일본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으나 지병인 뇌혈전중(중풍)으로 성모병원에 입원, 운명할 때까지 머물러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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