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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전기 나눠주고 표 얻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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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정재
논설위원
경제연구소 연구위원

1970년대 풍경 중 하나가 전봇대다. 콜타르가 잔뜩 칠해진 쭉 뻗은 낙엽송. 만지면 시커먼 타르가 묻어 나왔다. 그래도 좋다며 동네 꼬마들은 빨리 올라가기 내기를 하곤 했다. 속가시 많은 낙엽송은 잘못 올라가면 용서 없이 손바닥이며 허벅지를 가시로 찔러댔다. “여기는 내 땅” 동네 견공들의 영역 표시가 집중되는 곳이기도 했다. 가끔 동네 꼬마들과 취객도 거들었다. 여름이면 지독한 사람+개 오줌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나마 이런 전봇대도 없는 시골 마을이 80%는 됐다.

 그 시절 박정희 정부의 중요 사업 중 하나가 농어촌의 전화율(電化率) 높이기였다. 전기 보급률이랄 수 있는 전화율은 도시가 100%인 반면, 시골은 20%에 그쳤다. 70년 3월, 당정이 합심해 내놓은 농어촌 전화 사업은 아주 구체적이다.

‘3차 5개년계획이 끝나는 76년까지 농어촌 전화율을 52.4%로 높인다. 이를 위해 전봇대 8만 개, 전선 4250t, 변압기 8000대를 80가구 이상 주민이 사는 농어촌에 공급한다. 인건비 빼고 459억원이 든다. 재원은 등유세를 2배 올려 충당한다.’

등유는 당시 대중목욕탕이나 도시민들 난방용으로 주로 쓰였다. 도시에서 돈을 거둬 농어촌에 뿌린 셈이다. 그때만 해도 선거는 ‘여촌야도(與村野都)-여당은 시골, 야당은 도시에서 표를 많이 얻는다’의 전설이 살아있을 때였다. 그러고 보면 당정이 농어촌 전화 사업에 열을 올린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전기=표’가 되던 시절이었단 얘기다.

 이젠 잊혀진 이런 풍경을 또 보게 된 건 올 4월 캄보디아의 프놈펜에서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화로(火爐) 프놈펜은 총선 열기로 더 뜨거웠다. 냉방이 끊긴 사무실에서 한 정부 관계자가 말했다. “전기로 표를 사는 거죠.” 선거 때면 외국인 소유·입주 빌딩과 일급 호텔의 전기를 끊고 대신 서민에게 나눠주는 연례 행사를 두고 한 말이다. 그때까진 상당히 효과를 봤다는 게 캄보디아 정부의 분석이다.

그 뒤 석 달이 흘러 총선이 얼마 전 끝났다. 압승을 자신했던 훈센 정권은 뚜껑을 열고 보니 웬걸,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야당이 55석을 차지하며 여당을 13석 차이로 바짝 추격했다.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캄보디아에서도 ‘전기=표’가 되는 시절은 얼추 지나가고 있다는 얘기다.

 이쯤에서 비스마르크적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그는 우파지만, 복지 국가의 원형을 만들었다. “인간은 가진 게 있어야 잃을 것을 두려워한다”며 “사회 보장이야말로 보수·우파를 늘리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여기서 사회보장을 전기로 바꾸면 ‘보수·우파 지지표를 얻기 위해선 충분한 전기 공급이 필요하다’가 된다. 후진국일수록 이런 가설이 참 명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2013년 8월의 대한민국 풍경은 어떤가. 올여름 국민은 충분히 더위에 단련받고 있다. 그나마 지금까진 사상 최장 장마 덕을 봤다. 문제는 다음 주부터다. 본격 무더위가 시작된다. 정부 대책은 ‘줄·푸·요’ 수준이다. (전기 씀씀이) 줄이고, (절전 기업에) 돈 풀고, (피크타임엔) 요금 더 물리기다. 70년대 ‘한 등 끄기’식 읍소형 절전 대책에서 한 걸음도 나아간 게 없다. 하늘이 도와 올해는 어떻게든 큰 사고 없이 넘어간다고 치자. 내년엔 어쩔 건가.

 전력난의 핵심은 원전이다. 후쿠시마 사태 이후, 원전 신화는 사실상 끝났다. 인정할 건 인정하자. 원전은 더 이상 값싼 에너지가 아니다. 환경·안전 이슈는 원전의 사회적 비용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려 놨다. 밀양 송전탑은 그중 한 예다. 주민 요구대로 밀양 구간 37㎞를 땅속에 깔려면 2조7000억원이 더 든다. 전체 사업비 5200억원의 다섯 배가 넘는다. 이런 갈등이 어디 밀양으로 끝나랴. 벌써 충남 당진 등 곳곳이 들썩인다. 갈수록 원전 비용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원전과 관련, 박근혜 정부는 구체적인 밑그림을 내놓지 않고 있다. 애매한 현상 유지 정도다. 올 초 확정된 6차 에너지수급기본계획에는 2025년 이후 신규 원전 건설이 공란으로 남아 있다.

 해법은 다 나와 있다. 신재생 에너지 대폭 확대부터 이웃나라에서 전기 사오기까지, 선택만 남았을 뿐이다. 화끈하기론 서울 한복판에 원전을 짓자는 장정욱 일본 마쓰야마대학 교수의 주장이 압권이다. 환경단체의 원전 완전 폐기도 대안이 될 수 있다. 물론 어느 쪽이든 국민적 합의가 중요하다. 문제는 시간이다. “내년이면 괜찮아진다”는 말, 이젠 그만하자. 어물쩍 시간만 보내다가 캄보디아처럼 되려는가. 전기 나눠주고 표 얻는 나라, 그건 아니잖은가.

이정재 논설위원·경제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