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김종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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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5·16혁명∼공화당 창당∼두 차례의 외유∼정계진퇴에 이르는 김종필씨의 파란에 찬 정치역정은 곧 집권공화당이 밟아 온 60연대역사의 영광과 오욕의 단층이었다.
『우리는 4·19와 5·16혁명의 이념을 계승하고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의 꽃을 피우며 조속한 근대화를 도모해야 할 시대적 요구를 담당해야 할 새 세력으로….』
이런 선언을 내면서 출발한 공화당의 산파는 바로 김씨였지만, 그의 호전적 자세는 집권세력내부의 역작용을 자초하여 두 차례나 자의반 타의반의 외유를 해야 했다.
「이상6, 현실 4」의 공식에 맞추어 펼치려던 그의 정치구도는 번번이 좌절되었으며 한때의 독주는 끝내 정계은퇴선언까지 간 것이다.
그가 5·16혁명을 지휘한 것은 아니지만, 주요「멤버」로 지나치게 큰 권력을 거머잡고 중앙정보부장, 대통령특사, 그리고 세 차례의 공화당의장을 맡으면서 한일협상을 비롯한 주요문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공화당의 사전조직과 이원조직, 김·대평「메모」, 4대 의혹사건, 공화당 안에 있었던 갖가지 파동의 핵심은 항상 그에 대한 거센 비난이었으며 한동안 소리 높던 행정부와 여당의 불협화음에도 그의 이름이 들먹여졌다.
63년 선거 때 기염이 올라 한 두 해 동안 모진 비판을 받은 민족적 민주주의도 바로 김종필씨에 대한 비판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수구적인 역사를 전환하는 조타수로 자임하고 공화당을 만들어 민족적 민주주의와 근대화운동을 내건 것이다.
민족적 민주주의와 근대화운동의 재창 그 자체는 중대한 경고였다. 이 경고와 도전도 낡은 정치풍토를 극복하지는 못했으며 오히려 그의 독단 성을 감싸는 허울로 지적 받기조차 했다.
그가 공화당에 있는 동안「박·김 체제」라는 말은 흔히 들을 수 있던 일.
아닌 게 아니다 부드러운 외모, 특유의 억양을 지닌 설득력으로 그는 60년대의 정치를 강하게 점철했다.
거센 바람에 밀려 정계를 은퇴하고 칩거하던 금씨는 3선 개헌작업을 현실긍정의 차원에서 받아들여 개헌지지 설득을 위한 전국 주 유에 나섰었다.『개헌문제로 무척 고민했으나 박대통령의 결단이 내려진 이상 이를 뒷받침하는 것만이 옳은 것으로 판단했다』는 자신의 입장해명에서 유세는 시작됐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설득행각에 나섰다는 자체에 미묘한 관심을 갖고 몰려들었으나 그는 후계자부재론을 들고 10일 동안 40여 개 도시를 누볐다. 그리고 그가 야인이면서도 한국정치의 색다른 위상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개헌이 이루어진 뒤 그는 다시 초야로 돌아갔다. 때때로 그림을 화폭에 담고「아코디언」으로 흘러간 노래를 읊는 그에게 그러나 정치적인 눈은 계속 쏠리고 있다.
박대통령의 조카사위라는 특수한 관계, 혁명의 동지였고 한때 오른팔이었던 특수한 입장은 정치권외에서 마저 그의 정치적 위치를 가름하는「모티브」로 작용하는 것일까.
『목수는 자기가 살기 위해 집을 짓는 것은 아니다.』(68년 공화당을 탈당하면서)-.『선량한 시민으로 나라를 위해 봉사하겠다.』(69년 개헌이 끝난 뒤)-.
그러나 그의 나이 이제 44세. 70년대로 접어든 정치무대에서 그가 끝내「조역」에 머모르로 말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많은 것 같지 않다. <심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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