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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교착 상태, 헤겔이라면 극복할 수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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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슬라보예 지젝은 현재 가장 주목받는 지식인인 동시에 난해한 저작으로 비판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21세기 사회가 처한 지적·정치적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헤겔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앙포토]

2008년 영국 일간지 가디언 기자가 슬로베니아 출신의 세계적인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64)을 인터뷰하며 물었다. 과거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면 어느 시대를 택할 것인가. 지젝은 “19세기 초반의 독일로 가고 싶다”고 했다. “대학에서 헤겔의 강의를 직접 듣고 싶기 때문”이다. 당시 자신이 갖고 있는 가장 비싼 물건으로 꼽은 것도 독일에서 개정판으로 출간된 『헤겔 전집』이었다.

 최근 그의 신간 『헤겔 레스토랑』과 『라캉 카페』(새물결)가 국내에 나왔다. 1800쪽에 이르는 원작 『Less Than Nothing』을 두권으로 나눠 출판했다. 플라톤부터 프로이트를 거쳐 알랭 바디우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의 핵심적인 논쟁을 조명했다. 핵심 키워드는 헤겔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자’ 헤겔을 현대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했다.

 헤겔과 마르크스, 라캉을 접목해 자신만의 이론체계를 구축한 것으로 유명한 지젝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상가 중 한 사람이다. 실천적 철학자이면서 ‘문화이론의 엘비스’라 불릴 만큼 인기도 높다. 난해한 이론 전개로도 유명하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29일, 미국의 사상가 노엄 촘스키(MIT 교수)가 “지젝이 얘기하는 것은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못하겠다”고 꼬집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도 인기높은 그를 e-메일로 만났다.

 -엄청난 분량의 책이다. 정치 팜플렛 같고, 철학적 논고를 담고 있는가 하면 문화 평론으로 읽기히도 한다.

 “20~30년 동안 꿈꿔온 ‘필생의 역작’(opus magnum)이다. 이 두꺼운 책이 영어권에서만 1만부가 팔리고 현재 10여 개국에서 번역되고 있다. 특히 영어 이외의 언어로 번역돼 출간된 것은 한국이 처음이다. 그동안 어둠 속에 있던 헤겔을 다시 조명하고, 지금 한참 유행하고 있는 라캉의 전혀 새로운 얼굴을 하나로 결합시켰다는 점이 가장 뿌듯하다.”

 -왜 헤겔인가.

 “헤겔은 읽으면 읽을수록 경이로운 사상가다. 그는 대학생 때 프랑스 혁명을 대환영했다. 그러나 혁명은 곧 공포정치로 변질됐다. 그래도 그는 자유 이념이 역사의 종언을 향해 가리라는데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그것은 프로이센의 군주제와 관료주의로 귀결되고 말았다. 어디서 많이 들어보던 이야기 아닌가? 헤겔은 21세기라는 ‘우리 시대의 아들’이다.”

 21세기 지구촌의 현실이 헤겔이 마주했던 역사적·정치적 상황과 너무도 흡사하다는 의미다. 그는 이번에 ‘무(無) 이하인 것(Less Than Nothing)’이라는 개념에 천착했다. 이는 ‘있음’과 ‘없음’이라는 이분법적인 도식을 넘어선다. 책에서 그는 셜록 홈즈와 경찰서장의 대화를 인용했다. “제가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까?” “그렇소. 그날 밤 개의 이상한 행동을 놓치지 마시오.” “그날 밤 개는 전혀 짖지 않았는데요.” “그게 바로 이상한 행동이오.” ‘없음’은 아무것도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없는 것이지만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어떤 것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진보적 사유’하면 흔히 마르크스를 든다. 그런데 당신은 헤겔의 복권에 무게를 뒀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마르크스’는.

 “기준은 우리 시대가 당면한 지적 과제를 해결하는데 마르크스나 헤겔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헤겔이, 그리고 ‘헤겔의 반복으로서의 라캉’이 우리 시대의 교착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핵심적인 아이디어를 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책에서 마르크스야말로 헤겔을 오해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헤겔의 많은 부분이 유물론적인 반면 마르크스의 많은 부분이 관념론적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했다. 마르크스는 국가를 폐지한 사회주의를 제창했으나 전체주의 등 국가에 의한 폭력으로 진보주의가 좌절했다는 것이다. 반면 헤겔은 여전히 국가를 최고의 해결책으로 고민했다고 강조한다. 지젝은 “오늘날 가장 서둘러야 하는 과제는 국가가 금융 부분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보수와 진보에 관한 논쟁이 뜨겁다. 당신이 보기에 ‘진보적인 것’의 기준은.

 “‘보수’와 ‘진보’라는 말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달려있는 것 같다. 그리고 여기에 헤겔이 가르치는 대로 개념은 시대정신 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자본가들은 경제적으로 최고의 혁신가이지만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이다. 또 중국의 정치가들은 이념적으로는 사회주의를 옹호하지만 가장 뛰어난 ‘자본가’(이 말을 여러 가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이기도 하다. 진보와 보수는 한 사람에게도 공존하는 등 일종의 아이러니 속에 있는 것이다.”

 지젝은 9월 24~29일 한국을 찾는다. 경희대 특강, 세계적인 철학자 알랭 바디우 등과 함께 하는 학술대회 참석 등이 예정돼 있다.

  그는 “한국은 놀랍지 않은 부분이 하나도 없다고 해야 할 정도로 경이롭고 신비한 나라”라며 “분단 등 정치적 상황도 흥미롭고, 눈부신 경제 성장이나 영화 분야에서의 활약도 놀랍다”고 말했다.

이은주 기자

◆슬라보예 지젝=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 사회학연구소 선임연구원. 1990년 슬로베니아공화국 대통령 선거에 개혁파 후보로 나서기도 했다. 정치이론, 영화이론, 정신분석학 등을 아우른다. 미 시카고대, 컬럼비아대, 프린스턴대, 뉴욕대, 런던대 버베크칼리지 교환 교수 역임. 저서 『멈춰라 생각하라』 『폭력이란 무엇인가』 『삐딱하게 보기』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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