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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흘러간 뉴스·메리커들|자와할랄·네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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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간디」와 더불어 인도역사의 쌍벽을 이루었던 「자와할랄·네루」가 사망한 것은 64년5월27일이었다.
인도독립의 주역이었으며 냉전시대에 중립주의 진영을 대변했던 그의 사망소식은 5억원의 인도국민을 비탄속에 몰아넣었고 「유엔」은 이례적으로 1백20여 회원국기를 철수하고 반기의 「유엔」기를 게양함으로써 『세계의 별』 이 떨어졌음을 애도했다.
권력보다는 명예를 택했던 그를 가리켜 누군가가『기질은「로맨티시스트」, 신념은 유물논자, 선택은 이상주의자, 심정은 「휴머니스튼」』라고 한적이 있다.
192l년 영국황태자 「프린스·오브·웨일즈」(현재의「윈저」공)가 인도를 방문했을 때 환영 「보이크트」운동을 주동했다거 투옥된 것을 필두로, 전후 9차에 걸쳐 11년간을 형무소에서 보낸 그의 과거는 그 자체가 인도의 독립투쟁사이기도 하다.
원래 「네루」 의 집안은 빨래를「파리」의 세탁소에 보내고 있다는 소문이 날만큼 당유했으나 「네루」 자신은 농민들과 곧 잘 어울리는, 지도자로서의 도량이 풍부했다.
「간디」가 그를 후직자로 지목했음에도 그는 결코「간디」의『물레』를 택하지 않고 인도의『산업화』를 제창할 만큼 현실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49년10월, 미국하원에서의 연설에서 「네루」는 『우리 인도는 원자탄을 가지지 않은 것을 기뻐하고 있다』고 말해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었다.
그의 이 말은 비동맹곽 중립을 내세우던 그의 노선을 단적으로 표현해 준다.
60년대 중반기에 「네루」가 국제정치 무대에서 사라진 것은 체제적인 면보다는 정신적인 면에 더 큰 의의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62년 가을 중공이 대대적으로 인도의 국경을 침공해 왔을 때 「네루」는 반 중공의 기치를 높이 들었고, 동시에 소련은 서방과의 평화공존 정책수행에서 「네루」의 교량적 역할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 번이나 인도의 수상직을 역임했던 「네루」 는 또 처복이 없던 지도자 중의 하나있다.
전형적인 「캐슈미르」명문 출신이었던 부인 「카말라」 는 총명한 내조자로 유명했으나「네루」를 끝까지 보필하지 못하고 오랜 병고로 시달리다가 죽었기 때문이다.
바쁜 독립투쟁 시절에도 「네루」는 부인을 영국, 「프랑스」, 독일 등지로 데리고 다니면서 부인의 병 치료를 위해 힘을 썼지만 허사였다.
「스위스」근에서 부인의 병 간호를 하던「네루」가 빨리 귀국하라는 국민들의 성화에 못 이겨 일시 귀국하려고 비행기표를 예약해 놓은 날 「카말라」 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부인의 유골을 안고 귀국한「네루」는 그후 재혼을 하지 않았으며 무남독녀 「인디라·간디」가 아내 없는 아버지의 딸 겸 집안의·여주인으로서 아버지의 뒤를 보살펴 주었다.
「간디」여사는 「네루」의 생존시에 공식적인「퍼스트·레이디」로서 그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으며 드디어,「샤스트리」수상의 과도기를 지나 지금은 인도의 여 수상으로서 아버지「네루」의 유업을 계승하고 있다. <김건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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