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오감도' 연재 위해 사표 지니고 다닌 이태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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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상과 박태원은 늘 붙어다니던 친구였다. 왼쪽부터 이상·박태원·김소운. [사진 이재복 교수]

순수문학을 추구했던 구인회는 이태준과 박태원의 활동공간인 동시에 인간적 교류의 장이었다.

 두 사람은 이상·김기림 등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다. 김기림이 “구인회는 꽤 재미있는 모임이었다. 가령 상허(이태준)라든가, 구보(박태원)라든가, (이)상이라든지 꽤 서로 신의를 지켜갈 수 있는 우의가 그 속에 자라가고 있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유쾌한 일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들은 1937년 이상이 요절한 뒤에도 유대관계를 이어갔다. 특히 박태원과 이상의 사이가 돈독했다.

 구인회 동인이 문학적 기량을 발휘하고 문단에서 입지를 굳건히 하는 데 신문사에서 일하던 이태준과 김기림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이들은 이상이나 박태원 등이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지면을 제공했다.

 특히 이태준은 ‘조선중앙일보’ 문예부장으로 일하면서 독자와 평론가의 비판에도 이상의 시 ‘오감도’와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등 실험적인 작품의 연재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실제로 1934년 7월24일 이상의 시 ‘오감도 제1호’가 ‘조선중앙일보’가 실린 뒤 신문사에는 폭탄테러를 하겠다는 항의가 빗발쳤다. 작품이 너무 이상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이태준은 사표를 품 속에 넣고 다닐 정도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항의로 연작시 ‘오감도’의 연재는 8월8일 중단됐다.

 이상은 박태원의 여러 작품에 소재로 인용됐다. 이상의 사생활에 누구보다 정통했던 박태원은 절친한 친구인 이상을 모델로 한 여러 편의 작품을 썼다.

박태원의 소설 ‘제비’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실제 인물인 이상을 그대로 담아냈고, ‘애욕’ ‘염천’ 등의 소설에도 이상의 애정행각을 그려넣었다.

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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