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방송국 점거 … 무르시 측, 쿠데타로 규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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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 지지자들이 3일(현지시간) 이집트 다미에타 시내에서 반정부 시위자를 집단구타하고 있다. [다미에타 AP=뉴시스]

이집트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을 필두로 한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과 군부, 세속·자유주의 세력이 연합한 반정부파의 대립이 극한으로 치닫고 있다. 양쪽이 최후통첩과 결사항전의 다짐을 주고받으며 ‘치킨 게임’ 양상으로 전개되는 분위기다.

 무르시는 3일 자정 직후 46분 동안 방송된 TV 연설에서 “목숨을 걸고 (대통령직의) 적법성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그는 페이스북을 통해 제정파에 의한 연립정부 구성을 제의했다. 지난 1일 “48시간 안에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군이 나서겠다”고 밝혔던 군부는 무르시의 연설 뒤 즉각 반응을 내놨다. 군 최고위원회를 이끄는 압델 파타 엘시시 국방장관은 성명을 통해 “이집트와 이집트 국민을 위해 기꺼이 피의 희생을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뒤이어 이집트 국영 방송국을 점거한뒤 직원들을 쫓아내고 병력을 방송국 안팎에 배치했다. 무르시 대통령측은 "이것은 명백한 군사 쿠데타”라고 밝혔다.

 이집트 곳곳에서는 양쪽의 충돌이 계속됐다. 카이로대에서는 무르시 지지파가 경찰과 충돌, 총격전이 벌어져 최소 16명이 숨지고 200여 명이 다쳤다. 미 ABC방송은 두 세력이 공멸의 길을 걷고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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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아랍의 민주화 열기를 타고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를 쫓아낸 이후에도 서민 생활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최초의 민선 대통령인 무르시가 지난해 6월 취임한 뒤에도 상황은 오히려 악화됐다. 혁명 직전 300억 달러였던 국가 부채는 5월 현재 400억 달러로 늘었다. 같은 기간 정부의 현금 보유액은 340억 달러에서 160억 달러로 떨어져 생필품 수입이 힘들 지경에 이르렀다.

 무바라크 축출 뒤 과도정부를 이끌면서 독재정권 때와 똑같은 민중 탄압과 권력 공고화를 꾀해 시민들의 외면을 받았던 군부가 지금은 야권과 시민단체의 환영을 받는 모순된 상황도 여기서 비롯됐다. 높은 실업률과 물가, 인플레이션 등으로 고조된 민중의 불만이 무르시 정권의 이슬람 원리주의 강화 정책을 계기로 터져나오면서 자유주의 세력이 ‘적과의 동침’을 선택한 것이다.

 이집트에서 군부의 영향력은 여전히 압도적이다. 혁명 전 60여 년 동안 이집트의 가장 강력한 통치 세력은 군부였다. 무바라크 축출도 군부가 그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무슬림형제단과 무르시에게 패한 뒤 물갈이가 단행됐지만, 군부의 힘을 완전히 빼기란 불가능했다. 아직도 이집트 국내총생산(GDP)의 25~40%를 군부가 주무른다.

 반정부 세력은 벌써 ‘포스트 무르시’를 대비하고 있다. 야권은 이날 연합 대표로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을 선정했다고 밝혔다. 군부는 무르시를 몰아낸 뒤 헌법재판소장이 이끄는 과도정부를 수립, 개헌을 통해 조기 대선·총선을 치른다는 로드맵을 마련했다.

 하지만 무슬림형제단의 세도 무시할 수 없다. 무슬림형제단의 열성 조직원은 60만 명, 추종자는 수백만 명으로 이미 본부가 전국 소집령을 내렸다. 무슬림형제단의 원로 지도자 무함마드 알벨타기는 “쿠데타를 막기 위해서는 순교자의 고통을 마다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사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자 미국도 중재자로 나섰다. AP는 미국이 무르시에게 조기 선거 등을 통해 야권의 요구를 충족시킬 것을 제안했고, 군부에는 쿠데타를 일으키면 한 해 13억 달러에 이르는 군사 원조를 끊을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고 보도했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군부는 과거의 패착으로 외면받은 바 있기 때문에 쉽게 군사력을 쓰지는 않을 것”이라며 “무르시로서는 선거를 앞당기고 자신도 참여하는 식으로 양보하는 게 실리를 챙기는 선택”이라고 분석했다.

유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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