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의료원 14곳 '고용세습' 노조가 단협으로 못 박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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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지방의료원 34곳 중 14곳이 업무상 사망이나 상해 때문에 퇴직한 노조원의 자녀를 우선적으로 채용하는 소위 ‘고용 세습’ 규정을 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공의료 국정조사 특위의 새누리당 이노근 의원은 전국 34개 지방의료원 등에서 제출받은 단체협약서를 분석한 결과를 3일 발표했다. 이 의원에 따르면 전국 지방의료원의 41%인 14곳의 단체협약서에 이런 조항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진주의료원을 비롯해 서울·부산·경기·천안·공주·홍성·서산·남원·순천·강진·원주·김천·제주 의료원이 여기에 해당한다.

 지난 1일 폐업이 확정된 진주의료원은 우선 채용 대상에 업무상 사망·상해 등의 산업재해뿐만 아니라 정년퇴직자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의료원 노사는 단체협약 66조(우선 채용)에 “정년퇴직자 또는 업무상 병이나 상해를 얻어 불가피하게 퇴직하는 자의 요구가 있으면 피부양가족을 우선 채용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고용 세습 조항을 가진 병원에서 실제로 퇴직자의 자녀를 우선 채용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지난 5월 유지현 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위원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진주의료원에서 그런 사실이 있는 것처럼 얘기했다. 하지만 유 위원장은 3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진주의료원 직원의 자녀 1명이 그렇게 채용된 것으로 얘기했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내가 잘못 말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의원에 따르면 일부 국립대학병원도 고용 세습과 유사한 단체협약을 두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치과병원을 제외한 전국 국립대병원 10곳 중 서울대병원과 전북대병원이 유사한 조항을 두고 퇴직자의 자녀를 우선 채용하거나 채용 과정에서 가산점을 부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원주의료원과 서울대병원 단체협약에는 자녀 우선 채용은 물론 ‘직계 자녀에 대해서는 학자보조금을 계속적으로 지급한다’는 규정도 있었다.

 이 의원은 “기업 경영과 인사 사항은 단체교섭이 될 수 없고 단체협약에 넣을 수 없다는 판례가 나와 있다”며 “정부는 해당 의료원의 단체협약을 바로잡고 감사원이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울산지법은 지난 5월 초 정년퇴직 이후 업무상 재해(폐암)로 사망한 전 현대자동차 노조원 유족이 회사를 상대로 낸 고용의무이행 청구소송 1심에서 “업무능력 여부를 불문하고 업무상 재해로 사망한 조합원의 유족을 고용하도록 한 현대차 단협은 무효”라고 판결했다.

 이에 대해 해당 병원들은 “자녀를 우선 채용할 수 있다는 임의조항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임종필 서울대병원 홍보팀장은 “1980년대 중·후반 직원의 생계보전 차원에서 마련된 것”이라며 “실제 적용된 예가 없어 사문화된 조항”이라고 말했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사기업에서조차 고용 세습을 무효화하는 판례가 나왔는데도 세금으로 운영되는 지방의료원 등이 이 같은 단체협약을 유지하고 있는 건 문제가 아닐 수 없다”며 “공공기관이 직원을 채용하는 것은 공적 행위이기 때문에 민간보다 엄격한 기준에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김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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