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계위협 속에서-전 휘문중·고 교장 서병성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이번 「스승의 날」은 내 평생 가장 쓸쓸한, 그러나 감회 깊은 날이 돼버렸습니다.』
38년간을 교직에서 근무하다가 지난3월 휘문중학 교장직을 물려남과 함께 교직을 은퇴해 버린 서병성씨(64)는 반생을 불사른 교직을 떠난 것을 몹시 서운해했다.
『정년이 내년이어서 이를 채우려했지만 작년부티 나빠진 건강 때문에 퇴직을 앞당기게 됐어요. 할 일도 많이 남았지만….』 그도 인생이니 어쩔 수 없지 않으냐는 아쉬운 표정이다.
교원을 하게된 동기부터 얘기를 꺼낸다. 『경기중학2학년 재학 때 3·1운동이 났습니다. 이어 일본의 식민지하책은 본색을 드러냈고 우리 민족은 노예취급을 당하다시피 했습니다. 젊은 기분에 밤잠을 못 자고 그 원인을 곰곰 생각하곤 했습니다. 결국 배움이 뒤져있기 때문이라는데 귀결됐지요. 열심히 배워서 가르치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어요.』
그는 이러한 감정은 자기 뿐 아니라 당시의 모든 학생이 같았다면서….
『일본인에대한 감정은 교원들이 관립학벌에 취임을 거부하는 예까지 빚었으며 일본어를 일부러 안 쓰는 교원도 많았어요.』 그는 경성대학을 졸업하고 당시 경성사범에 배치를 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 한다.
교원의 사회적 지위도 지금과는 비교가 안되었다고 한다.
『송도중학에서 받은 초임봉이 월85원으로, 얼마 안 있어 1백20원이 되었습니다. 공립중학 교원은 초임금이 75원이어서 경찰의 10원 미만과는 엄청난 차가 났어요. 일반 공무원은 45원 바Rd 못 받았어요. 이때 쌀 1가마에 5원씩이었으나 내 초봉이 쌀 17가마 값을 받은 셈이죠. 실제 생활은 30여원이면 됐으니 풍족한 살림에 연구활동도 할 수 있어 남의 신세 안지고 살았지요.』
『내가 있던 휘문중학은 지금 월급 「베이스」가 높은 편인데도 2만2천여원 밖에 안됩니다. 쌀 4가마 값도 빠듯하니 옛날의 5분1정도의 급료를 받은 셈입니다. 이것만 가지고는 어지간한 가정은 살림 꾸려나가기에도 모자랍니다. 그러니 잡부금이니 부정교원이니 하는 불미한 얘기가 나오게 되고 교도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지요.』
타락한 사도의 앙양을 위해서는 생활보장이 전제조건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러나 교원이 반대급부에만 눈을 밝혀서는 안돼요. 교원이 되기 위해서는 사랑과 열의. 부단한 연구가 필수조건입니다. 이것이 곧 올바른 사도의 확립과 통하는 조건이기도하지요.』
『사도가 떨어진 것은 세태에도 원인이 있읍니다. 요즘 교장은 매일 관에서 소집하는 의의나 공문을 전달하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자신의 주견을 학교운영에 반영시킬 여유는 거의 없다시피 하니 「로보트」나 다름없읍니다. 또한 이른바 「세대교체」의 오도도 문제입니다. 무조건의 「장자 멸시경향」은 교육의 권위만 떨어뜨리는 거요. 적어도 교육계의 세대교체는 점진적으로 실력에 맞춰 해야합니다.』
『38년간 송도·양정·경기·경복·휘문 등 남학교만 돌아서 재미가 없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그래도 길에서 만나면 막걸리 마시러 가자는 제자를 보면 흐뭇합니다』는 그의 취미는 화초가꾸기. 슬하에 3남과 8명의 손자 손녀가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