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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미켈슨이 여자였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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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엄을순
문화미래이프 대표

‘며느리가 시아버지 제사에 참석 못한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되냐? 아무리 네 일이 중요해도 그렇지’. 시어머님의 얼굴 표정이 싸늘하다.

 거액의(?) 계약금까지 받고 모 단체장 프로필 사진 일거리를 맡았다고 ‘좋아라’ 했더니만 하필 시아버님 제사랑 겹치다니. 미용실이며 촬영 장소 예약이랑 수행비서 등등. 복잡해서 날짜를 바꿀 수도 없다. 촬영이 낮 시간이라면 일 끝내고 저녁에 제사를 지내도 되겠지만, 약속 시간이 하필이면 제사상 차리는 시간이다.

 밤새 고민했다. 비록 못되고 이기적인 며느리라 할지라도 책임감 있는 커리어 우먼을 택할까, 아니면 직업의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착한 며느리를 택할까.

 밤새도록 몸을 뒤척이며 내린 결론. 욕먹기는 싫고 기회는 또 있을 터이니 그냥 평범한 며느리가 되는 거였다. 다음 날 후배에게 가까스로 맡은 그 귀한 일을 눈물을 머금고 넘겨주었다. 미리 받은 계약금도 함께 말이다.

 그 후로 ‘사진작가보다 며느리’란 소문이 났는지 그런 굵직한 사진 청탁은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하긴 급히 중요한 곳에 써야 할 사진 촬영을 하기로 해놓고선 ‘시댁 제사가 겹쳐서 도저히 할 수가 없겠는데요’ 했던 여자를 어느 누가 또 찾겠는가. 나도 그런 여자에게 사진 안 맡긴다. 같은 값이면 누구든지 ‘가족보다 일’이 우선인 사람에게 일을 맡기고 싶지 않을까.

 그때 다짐했다. ‘비슷한 경우가 생기면 어떻게든지 내 맡은 일은 꼭 해내리라’고. 하지만 그런 기회는 두 번 다시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몇 년 후 딸 대학 졸업식 때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매년 해오던 ‘이프 페스티벌’과 딸 졸업식이 그만 겹쳐버렸다. 같은 날짜는 아니어도 졸업식 참석을 위해 미국을 다녀오면 행사를 할 수 없는 처지. 일이냐, 가정이냐. 선택은 하나.

 예전 경험도 있고, 이제 더 이상은 양보할 수도 없었고, 또 양보하고 싶지도 않았다.

 졸업식에서 딸이 상도 받는다지만, 이번에 또 양보하면 나의 일은 영원히 우선순위에서 밀릴 것 같았다. 눈을 질끈 감았다. 할 수 없이 남편 혼자 참석하고 돌아왔다.

 그때 그 딸이 지금은 다 커서 결혼도 하고 일도 씩씩하게 잘 하며 잘 사는데, 가끔씩 내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

 ‘엄마는 딸보다 일이 더 중요한 사람이잖아.’

 양보하고 포기하고. 뒤늦게 딱 한 번 정말 딱 한 번 졸업식 때 빠진 것뿐인데. 이럴 때 ‘헐’이라 하던가. 엄마 노릇. 정말 어렵다.

 보름 전인가. ‘딸 졸업식이 먼저…3시간 자고 3언더 친 미켈슨’이란 모 신문 스포츠면 헤드라인이 눈에 띄었다. 사연인즉슨.

 6월 14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아드모어의 메리언 골프장에서 열린 대회 1라운드에서 미켈슨이 경기 당일 새벽 3시30분 공항에 도착했다고 한다. 딸 졸업식에 참석하고 부랴부랴 대회장으로 향했기 때문이라는데, 그는 고작 3시간만 자고 퀭한 눈을 하고 메리언 골프장에 나타나서는 ‘딸 졸업식에 가길 정말 잘했다. 모두 네 명이 연설을 했는데 그중 한 명이 내 딸이었다. 정말 자랑스럽다’며 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 그에게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프로골퍼’란 타이틀도 주더라. 잘나가는 프로골퍼인데 자상하기까지 하다는 거다. ‘US오픈 경기를 잠도 3시간밖에 못 자고 경기 당일 새벽에 비행장에 도착하는 직업의식이 결여된 프로 골퍼’라고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미켈슨이 만약에 여자였다면 어땠을까. ‘딸 졸업식 때문에 가까스로(!) 경기 당일 새벽에 도착해서 경기를 치르다’. 뭐 이 정도? ‘US오픈을 도대체 뭐로 보고 딸 졸업식 갔다가 경기 몇 시간 전 공항 도착이야? 날씨로 비행기 안 떴으면 어째? 확실히 여자들의 직업의식은 큰 문제야’ 하지나 않았을까. 경기 결과와 무관하게 말이다.

 오래전 그때, 제사 대신 프로필 사진 찍으러 갔었다면 과연 난 어떻게 되었을까. 시댁에서 욕을 한 바가지 먹는 대신 지금쯤 프로필 사진의 대가가 되었을까.

 그 당시에는 내게 ‘며느리 책임을 소중히 여기는 프로 사진가’라 말하는 사람은 하나 없었지만, 지금의 미켈슨은 ‘가족을 소중히 여기는 프로 골퍼’란 말을 듣는 이유가.

 세월이 변해서인가. 남녀 차이인가.

엄을순 문화미래이프 대표